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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ik

위기와 기회 사이에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많은 위기를 겪어왔습니다. 먼저, 초대교회의 위기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부인하라는 로마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86년간 예수님은 나를 단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을 모른다고 할수 있겠느냐“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순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교부’였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신앙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중세의 교회는 또 다른 국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역사’는 역사 자체의 특성상 객관적인 사실 몇 가지로 전체를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평가하기로는, 이 당시의 ‘사제’들은, 믿음의 주인 ‘예수’를 따르기 보다는 ‘교황’과 ‘교황제도’를 옹호하였고, 이러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노력들은 로마 가톨릭이 타락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의 타락이라는 ‘위기’ 앞에서 한 사나이는 ‘성경’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틴 루터’(1483-1546) 입니다. 교황과 교황제도의 타락으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던 중세교회를 향하여 ‘95개조 반박문’으로 대항하였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재판에 서게 된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로마서 1:17’의 메시지를 들고 권력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그는 결국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지만,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이 역사적인 사건으로부터 우리가 현재 몸담고 있는 ‘개신교’가 시작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당시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성서를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만인제사장’이라는 개신교의 근본정신도 ‘루터’로 부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 중심’(Sola Scriptura, 오직 성서)의 개신교의 전통 또한 ‘루터’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이후로도 교회는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보다, 18세기와 19세기의 ‘위기’는 우리에게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를 남기게 됩니다. ‘계몽주의’로 인한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이성’에 매료되어 신앙을 져버렸던 당시의 ‘교양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존재 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도 없다.’라고 말하지만, ‘도덕을 위하여 반드시 요청되는 신’의 개념을 말하기도 합니다. 즉,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으로는 확인이 불가한 영역에 있지만, 생활세계의 도덕을 위하여서는 반드시 신이라는 존재가 요청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시기에, ‘프리드리히 헤겔’은 사변적인 철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정신’의 영역으로 드러내려고 하였지만, ‘절대정신’의 개념은 하나님의 승리가 아닌 인간의 정신적인 승리로 귀결되는 사변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슐라이어마허’라는 사람인데요. 그는 키가 작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에큐메니칼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종교론’(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을 위한 강연)이라는 책으로 당시 사람들이 멸시했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인식론을 인간의 ‘감정’의 영역으로 변증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은 사실 꽤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칸트, 헤겔, 슐라이어마허. 세 사람 모두, 인간의 내재적인 영역이지만, 분명히 무신론이 대두되는 시대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변증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후로 한 세기 동안, 인간의 내재적 측면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방법론들이 신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인간의 ‘내재성’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신학의 타락’이라는 결과입니다.

 

   이 ‘신학의 타락’의 결정적 요인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변증하려고 했던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의 탄생입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감명을 받은 신학자들은 종교와 신앙을 구분하지 못하였고, 오직 인간의 내재적인 능력으로만 성서와 종교를 해석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거부반응이 나타나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은 역사, 윤리, 정치 등으로 해석되어지는 ‘해석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신학의 타락’은 현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크게 공감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당시 ‘신학의 타락’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사건인 ‘제1차 세계대전’을 교회의 이름으로 옹호하였고, 이로 인하여 교회와 신학은 새로운 실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914년에 유럽의 ‘93명의 지성인’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수상의 전쟁 결정에 찬성하게 되었고, 그 중에는 ‘하르낙, 헤르만, 라데, 오이켄 등등’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서명도 포함되어 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전쟁에 찬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버리는 인간의 죄악된 본질의 대상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도 비슷한 결과)

 

   이러한 ‘위기’ 가운데에서 또 한명의 영웅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입니다. 당시에는 ‘자펜빌’이라는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와 신학의 실존 앞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계에 관철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내세웠던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져야 합니다. 과연 전쟁과 신학의 타락, 교회의 위기 가운데서 그가 나타내었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서’였습니다. 그는 교부들이 고집했던 ‘신앙’(믿음)과 종교개혁자들이 의지했던 ‘성서’ 그 중에서도 마치 마르틴 루터처럼, ‘로마서’를 들고 시골 ‘자펜빌’에서 온 유럽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가 주석하였던 ‘로마서’의 중심내용은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간의 이기심과 공명심으로부터 오는 결정들은, 인간 스스로는 “예!”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궁극적인 의”이며, 이것은 아무리 천재적인 인간의 노력이라고 하여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 이라는 것이지요. 즉, 당시의 전쟁을 찬성했던 신학자들의 입장은 논리적 궤변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의 뜻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가 현대 신학에 끼친 영향은 굉장히 파격적입니다. 성서의 권위를 다시 복권하기도 하였고, ‘삼위일체’신학으로 정면승부하며, 기독론 중심의 신학과 새로운 성령론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20세기의 교부로 평가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랑부를 담당하고 있는 파트 전도사입니다. 저는 목회를 배우고 있는 목회자 지망생으로서,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도 험난합니다. 그런데, 사랑부의 파트 전도사가 왜 신학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합니다.^^

 

  저는 COVID 19 바이러스로 인한 예배의 중단과 교회의 현실이 새로운 실존에 놓여있는 ‘위기’로 이해했습니다. 즉,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찾아온 새로운 ‘위기’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앞에 설명한 신학자들의 명과 암을 통하여 늘 가슴에 새기며 항상 다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위기가 올 때에는 반드시 ‘성서 그 자체’로 승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록되어 있는 ‘성서 그 자체’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서가 그 자체로 선포되기 시작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승리’의 희망을 갖게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제가 놓여있는 현실에서의 결단은,

 

“사랑부 지체들의 도덕 발달과 윤리적 차원을 강조하는, 또는 현대적인 의미를 강조하며, 세련된 적용점이 들어있는 “교육용 공과”가 아니라,성서 그 자체”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외부에서 오는 도전 때문에 위기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교회의 위기는 교회 안에서의 ‘믿음 없음’으로부터 시작된다.”라고 생각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 없음’은 ‘성서 그 자체’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서 그 자체’에 대한 믿음 보다는, 성서를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에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 말씀에서 나타나는 능력 보다는, 효과적인 전달방법, 세련된 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2차 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구하기 어렵고, 읽기도 어려운 ‘원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원전’은 오직 ‘성서 그 자체’라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외부에서 핍박과 박해가 강해질수록 더욱 똘똘 뭉치기 시작했고,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신앙과 순교의 피를 이어갔습니다. 중세의 타락에서 마르틴 루터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담대하게 교황에게 도전함으로 새로운 교회(개신교)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교회의 위기 가운데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실패를 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아무리 뛰어난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세련된 방법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신학은 도무지 정체를 숨길수가 없는 ‘인간의 뜻’과 ‘종교’로 우리를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의 실존에서 ‘바르트’가 담대하게 ‘로마서 주석’을 세상에 던졌는데, 후에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 이라고 말이지요.

 

   주지하듯이 우리가 겪은 이 위기의 상황은 인간적인 노력이나 이해, 새로운 방법으로 돌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현대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고 한들, 그것은 한낱 ‘인간의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폴리캅, 루터, 바르트처럼 “성서 그 자체”로부터 답을 찾으려고 기도했습니다.

 

   범지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래로부터 오는 질문들”을 차단하기 시작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위로부터 오는 대답들”에 집중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했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사랑부 지체들을 대상으로 “갈라디아서 강해”를 설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별명은 ‘작은 로마서’입니다. 그래서 더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했지요.^^)

 

   저희 사랑부가 영상예배를 참 잘 만들었다고 여기저기서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밀’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영상의 편집과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문외한(門外漢)입니다.^^;; 사랑부 가족들에게 성서에 나타난 믿음의 정수인 ‘갈라디아서 강해’를 설교하려고 마음먹었을 뿐, 우리 부서와 저에게는 기술과 장비, 시간과 물질 아무것도 없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어떤 기술과 장비도 없는 제가 무모하게도(?) 같이 동역하는 선생님들에게 방역에 주의를 기울이시면서 교회로 나와 예배를 녹화하자고 하였고, 선생님들도 제가 이렇게 기술이 전혀 없는 ‘영알못’(영상을 전혀 알지 못하는...)인 줄 모르고 “담대하게” 교회로 향하셨습니다.

 

   이후에 저는 놀라운 일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요. 단지 마음만 먹었을 뿐인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들을 풍성하게 경험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돕는 손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촬영과 편집을 도와주셨던 아무개 집사님, 사랑부 교사가 아닌데도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하나둘씩 나타나는 청년들, 예배가 중단 된 현실 앞에서 눈물을 그렁그렁 삼키고 오시는 선생님들. 또 외부에서 후원해주시고 기도해주시는 성도님들, 위로의 편지를 보내 주신 집사님 부부,,, 이 시기에 저는 말로는 다 풀어놓지 못하는 많은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저희 사랑부 지체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아닌데도 우리 사랑부 지체들이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사진이나 본인들의 간증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깐돌깐돌’하기만 했던 사춘기 사랑부 지체들이 이제는 제법 성숙해져서 기도제목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차주에 설교하는 본문을 미리 읽어보고 싶다고 연락하는 지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믿어져서 큰 은혜와 감동이 있었다는 지체도 있었고, 선생님들 또한 영상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하여 더 똘똘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즉, 누군가에게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사랑부 공동체 안에서는 부흥의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부에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예배에 대한 사명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하여 찬양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시간 안에서, 제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랑부 공동체적으로 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사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 단계를 내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코로나 이후’의 사태를 염두하고 있는 것이지요. 감염으로부터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며 ‘비대면’의 생활을 잘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면’하며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준비를 염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과거에 ‘대면’했던 방법들 뿐 아니라 다양한 ‘비대면 형식의 대면’을 돕는 플랫폼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추측이 아닙니다. 또한, ‘호모 데우스’(유발 하라리)를 비롯한 데이터에 잠식당한 사회를 그리는 ‘디스토피아’적인 세속의 예언들은 안타깝지만 꽤나 높은 확률로 적중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 전체적으로 주장하듯이 언제나 ‘교회’는 이러한 외부의 환경 변화, 무신론이나 데이터교(종교)의 도전들 때문에 위기를 맞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성서 그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 없음’이 진짜 위기를 초래할 것이고, 이러한 위기 속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교회는 ‘성서 그 자체’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기 위한 영적인 사역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사역’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영적인 사역’은 지성(헤겔), 감정(슐라이어마허), 의지(칸트)를 초월하며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우주적인 개념으로, 우리 인간의 전인격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영역이 ‘성서 그 자체’를 향하도록 선포하고 돌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지하듯이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무게를 두며 승부하는 사역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러한 ‘영적인 사역’은 성서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계를 거룩하게 완성하시고자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에 성도들 모두를 반드시 동참하게 할 것입니다.

 

   글을 맺겠습니다. ‘성령의 선물’인 ‘믿음’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미래에서 오는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서 그 자체’라고 조명하실 것입니다. 지금 많은 모임이 중단되고, 온라인/현장으로 예배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아래로부터 오는 질문들’은 잠시 멈추고, 이 상황 가운데에서 ‘위로부터 오는 대답’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로부터 오는 위로나 방법’이 아닌 ‘위로부터 오는 축복과 승리’를 경험하시고, 미래의 ‘영적인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며 준비하는 저와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 글은 천호동교회 소식지(성화지)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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