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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세속적 실존주의 관점에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렇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불평등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사회가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어디 이유가 그것만일까? 생물학적인 부모의 불평등, 자본에 대한 불평등, 교육에 불평등, 더 나아가면 국제적 불평등 등 가히 말할 수 없는 불평등한 삶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을 탓하지 않는 이유는 희망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 삶에 대한 책임의 심판이 잇따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자 앞에 섰을 때 그분 앞에 자신의 모든 삶이 파노라마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검증될 것이다. 그것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라고 하여도 말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공로 덕택에 죄악은.. 더보기
우리 영원히 살수는 없어?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한 어린 소년의 질문에 울컥해서 써봤다. 어린 소년의 질문이다. “네 가족 오순도순 행복하게 영원히 살 수 없어?” 우리는 이 질문의 대답은 어렴풋이 알지만, 그 의미를 너무 왜곡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껏 영원히 삶을 꿈꾸는 것 이면에 세속적인 의미들이 존속한다고 의심 없이 생각해왔다. 진나라의 황제는 영원한 권력 유지를 위하여 불로초를 찾았고, 현대의 생명공학은 생명의 연장을 위해 봉사한다. 이는 삶에 대한 끝없는 욕심이고 극적인 자아실현이고 생물학적 운명을 거스르는, 내가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지구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리는 이기성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그 자체가 세속적인 죄의 결과 혹은 더욱 본질에 대한 의미로부터 벗어난 사고가 아니었는가 생각.. 더보기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마주하고 죽음을 생각한다. 때로는 미루어 짐작하여 죽음을 예견하지만 늘 죽음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뜻밖에 불쑥 찾아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죽음을 멀게만 생각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 일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 볼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막연하게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 심판의 두 가지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것은 영속적이고 정의로운 일로 생각한다. 심판은 영원하고 정의롭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죽음 이후 심판은 영원할까?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친구가 지옥에 있다면 그 심판의 형벌이 영원하지.. 더보기
믿음 시리즈2편 믿음은 시작이다 (바르트 로마서) 믿음은 기적이다. 바르트의 로마서 4장 요약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과연 믿음 자체를 종교적 체험의 역사적, 심리적, 명료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존재의 지속적인 발전 속에 배열될 수 있는가? 믿음은 그럴 수 없다. 로마서에 기록하는 아브라함의 의는 그의 자격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바르트는 그의 의에 대한 믿음을 기적으로 기술했다. 그는 아브라함의 의를 아브라함의 ‘할례’와 전혀 다른 차원의 특성을 여기었다. 오히려 할례에 대한 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단지 종교적인 의일 뿐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직 경건하지도 않고 족장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전적 부르심으로서 그 안에 있는 순수한 시작이다. 아브.. 더보기
믿음 시리즈 1편 믿음은 기적이다 (바르트 로마서) 믿음은 기적이다. 바르트의 로마서 4장을 요약한 것입니다. 율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명이자 계시이다. 이는 율법을 폐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 성경, 종교가 자신의 고유한 의미 안에서 말하게 하고 ‘증언’하게 한다.(3:21) 예수의 빛은 구약성경의 빛과 다른 빛이 아니라는 사실 안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역사적 모든 인물들과 더불어 상호 연결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됨과 동시성을 지니고, 이것이 곧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면서 동시에 이를 더 굳건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 믿음이 행위와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기적임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더욱 그 의미를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위, 그의 행위는 의인의 행위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더.. 더보기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그녀의 미소 때문에.. 그녀의 모습.. 그녀의.. 부드러운 말씨.. 그리고 내 맘에 꼭 들고 힘들 때 편안함을 주는 그녀의 생각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나 당신 마음에 들기 위해 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렇게 얻은 사랑은 그렇게 잃을 수도 있는 법. 내 뺨에 흐르는 눈물 닦아 주고픈 연민 때문에 사랑하지도 말아주세요. 당신의 위안 오래 받으면 눈물을 잊어버리고, 그러면 당신 사랑도 떠나갈 테죠.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사랑의 영원함으로 당신 사랑 오래오래 지나도록 이것은 엘리자베스 바렛의 작품입니다. 그녀는 1806년에 태어나 1861년 죽은 시인입니.. 더보기
누구나 믿을 수 있다 바르트의 로마서 해설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와 믿음의 연관성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이미 역사 속 수많은 지점에서 그분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의로우심을 인식할 가능성과 기회를 언제나 가지고 있으며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우리와 만날 때 확증된다”(266)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어떤 제약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응답할 수 있고, 빛으로 가득한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예수가 최종적인 말씀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타자’에게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로서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는 높아지셨고(빌2:9), 바로 그 .. 더보기
안식 우리는 안식을 무엇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있을까? 본 글은 하워드 스나이더의 「하나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세상」 책의 6장 안식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안식이라는 개념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통치하실 최종적인 쉼의 때"(age)를 지향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샬롬으로 또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이해한다면 안식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섯째 날에 마치셨는가? 아니면 일곱째 날에 마치셨는가?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창조를 6일로 생각하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나이더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안식은 부정, 즉 단지 일의 중지가 아니라 긍정, 즉 휴식과 평화와 샬롬의 창조이다”라고 주장했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