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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다

고대근동문화-페르시아

고대근동문화 4장의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제 4장 페르시아인 - 에드윈 M.야마우치

1.메대인 (Medes)

메대인과 페르시아인은 인도-유럽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메대인의 수도는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고원을 잇는 대로 상의 엑바타나로서 자그로스 산악지역에 위치함.

메대인은 836년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 3세의 문헌에서 처음 언급.
아시리아은은 메대인으로부터 말을 얻는 데 관심이 있었다.

에살핫돈(680-669)은 672년에 메대 왕들에게 속국조약을 강요함. 자기 아들 아슈르 바니팔을 섬기도록 맹세시켰다.

예레미야가 말했던 북방변경에서 오는 적의 위협은 스키타이 기병을 가리킬 수 도 있다.

학자들은 메대인의 권력이 한껏 상승하는 것을 지켜보며 40년간 나라를 다스렸던 키악사레스의 연대를 625-585년으로 동의함. 독립왕국 메대의 마지막 왕은 아스티아게스(585-550) 그의 딸 만다나는 페르시아인 캄비세스 1세와 결혼해 “고레스” 대왕을 낳았다. 고레스는 550년에 페르시아를 이끌고 조부 아스티아게스와 메대를 대항한 반란에 성공했다. 그후 메대인은 페르시아 치하에서 종속된 시민으로만 존재함.

2. 페르시아인

1)고레스 2세 (559-530)

페르시아 제국의 왕들은 조상인 아케메네스를 따라 아케메니아인(Achemenians)로 알려짐. 아케메네스의 손자는 고레스 1세 (640-600?)그의 계승자는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인 고레스 2세의 아버지 캄비세스 1세였다. 페르시아인은 고레스 2세의 치세로부터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하기까지 광할한 영토를 지님으로 고대의 모든 제국 가운데 가장 거대한 제국의 하나를 일으킴.

546년 고레스가 리디아를 정복함. 그리고 나서 페르시아인은 바빌로니아인을 공격함 그들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였다(555-539). 나보니두스는 자기가 스스로 십년동안 아라비아로 망명했기에 다니엘서는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사살(Belchazzar)을 실제 왕으로 묘사한다.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539년 10월 12일에 배반자 구바루와 그의 부대가 싸우지 않고 바빌론에 입성했다는 사실을 입증함.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로 불리는 한 중요한 선전문서에 의하면, 바빌론의 주민들은 고레스를 정복자로서가 아닌 해방자로서 환영한다. 고레스가 거의 해골과같은 몰골의 바빌론 주민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들의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해주었다고 주장함.

고레스는 대부분의 정복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제의신상과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는 대신 자신의 속국 민족들의 신들을 위로하는 계몽정치를 함. 유대인에 대한 그의 관용은 유일한 것이 아닌 바빌로니아인과 다른 민족을 대했던 그의 자비와 동일한 것.

2) 캄비세스 2세 (529-522)

캄비세스 2세가 고레스를 계승함. 그의 주요 업적은 525년 이집트를 정복한 것. 이때 이집트의 배반자 우자호레스넷의 도움을 받음. 522년 캄비세스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본국 귀환을 서두름. 귀환 길에 우연히 자기 허벅지를 칼로 찔러 3주 후에 사망함.

3)다리우스 1세 (522-486)

새로운 왕이 캄비세스의 형제가 아닌 가우마타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리우스와 여섯명의 귀족들은 그 찬탈자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꾸밈. 다리우스가 방계출신이고 명백한 왕위 상속자가 아니었기에 그는 먼저 제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난 반역의 불길을 꺼야했음. 그중 이집트도 포함.

고레스 통치 하에 고향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 2세가 파괴했던 솔로몬 성전을 대신할 제2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반대에 부딪쳐 공사는 곧 중단됨 (스 4:1-5). 다리우스의 통치기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의 지휘 아래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 감동된 유대인들이 성전을 완공하려는 노력을 재개함. 그들의 대적은 성전을 건축하려는 유대인의 권리에 도전해 페르시아에 불만을 표함. 에스라 6:1-4에 의하면 다리우스는 그들의 청원에 대한 대답이 나옴. 다리우스는 성전 재건축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엄히 경고함. 성전은 파괴된지 70년이 조금지난 515년에 완공됨 (스 6:14-15)

고레스 통치 이후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던 이오니아 헬라인이 다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남서부의 수사와 아나톨리아 서쪽의 사르디스를 연결한느 “왕의 대로” 를 통해 “조랑말 급행”이란 전령제도를 정착시킴. (헤로도투스 8:98) (일반 여행객은 90일이 걸린 반면, 왕의 전령은 똑같은 거리를 1주일 이내에 달림) 다리우스는 또한 제국을 총독이 다스리는 주로 조직함. 무게와 도량형의 표준화와 주화 제조. 이후 페르세폴리스에서 486년 사망.

4)크세르크세스 1세 (485-465)

다리우스를 계승함. 그의 이름은 에스더서에 아하수에로(Ahasuerus)로 나옴. 가장 중요한 출처는 헤로도투스인데 그는 우선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을 염려해 479년 이후 시기에 관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음.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집트로 떠남. 바빌론에도 반란이 있었으나 진압됨. 이때 고전적 자료에 의하면 징벌로서 바빌론의 마르둑 신전과 거대한 지구라트를 파괴했다고 함. 이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침공을 준비함.

페르시아의 대병력이 그리스 북부로 진격함. 공포에 사로잡힌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의 도시를 포기함.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인물의 뛰어난 지도력 아래 헬라인이 결정적인 승리를 함.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7:61) 크세르크세스의 왕후는 아메스트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에스더서에서 그녀의 이름은 바스티(Vashti,와스디)이다

에스더의 보호자는 모르드개인데, 그 이름은 다리수스와 크세르크세스 통치시 페르세폴리스의 엘람어 서판에 기록된 페르시아 관료명부에서 입증됨. 에스더서의 저자가 보여준 수사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고 상세함.

에드서서는 페르시아의 관습과 배경에 관한 지식을 면밀히 드러냄.

5)아닥사스다 1세 (464-424)

아닥사스다 1세는 아르타바누스를 죽인 후 긴 통치를 시작.

458년 에스가라 토라의 설교자로, 445년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거룩한 땅에 돌아왔던 것은 아닥사스다의 치하였다. 일부 학자는 아닥사스다 2세 (404-359)의 치세 후기인 398년에 느헤미야가 에스라보다 먼저 왔고, 따라서 성경의 전통적인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이런 수정주의를 거부한다.

아닥사스다 1세가 그의 백성이 율법을 행하도록 에스라를 서기관으로 파송했다는 사실은 몇몇 비평가를 난처하게 만듬. 그러나 이것은 페르시아 정책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일임에 틀림없음. 다리우스가 이집트의 제사장이자 학자였던 우자호레스네트에게 비슷한 임무를 내린 적이 있다. “국가와 왕조의 사이스 신전에서의 제의 회복, 생명의 집들의 원활한 기능이 필수전제조건인 사법기관의 재구성”

비명의 증거는 느헤미야의 여러 대적인 사마리아인 산발랏과 암몬인 도비야, 아랍인 게셈의 역사성을 확정해줌.

3.페르시아의 건축과 예술

4.페르시아의 종교

페르시아에서 새로운 종교의 위대한 창시자는 ‘조로아스터’였다.
그러나 우리는 조로아스터의 생애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음. 연대추정에도 매우 큰 차이를 보임.

가타스에 의하면 조로아스터의 출신배경은 소떼의 목자였는데, 소들을 훔치고 도살했던 유목민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함. 그는 아후라 마즈다를 경배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던 제사장이었음. 42세때 통치자 비쉬타스파와 왕후 후타오사를 가장 유명한 개종자로 얻음.

조로아스터는 각자가 의와 거짓 가운데서 선택해야한다는 윤리적 이원론을 설파함. 악마 숭배자들의 난폭을 금지히고 피흘리는 제사를 반대함.

조로아스터의 메시지는 절대적 유일신론이었던 것 같지는 않음. 여러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가 일신교를 가르치지 않고 이원론을 가르쳤다고 생각함. 창세부터 존재한 두 영들인 선한 영과 약령으로 구성된 개념 .


다수의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가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기 동안 사탄, 귀신론, 천사론, 그리고 심판 , 부활, 계시록, 불시험, 천국과 지옥과 같은 종말론적 신앙에 대한 유대교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김. 그러나 이는 많은 유사점이 부정확하기에 유대교 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더 신빙성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