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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다

빌헬름 마틴 레베레흐트 드 베뜨

(과제 때문에.. 다른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보니 마땅한 글을 쓰기도 어려워서 읽고 있는 책의 일부분을 발췌해서 올립니다
독립출판이다보니 책 자체의 번역의 퀄리티가 상당히 낮아서..
직역, 오탈자가 상당히 많이 있어 상당부분 이해하기 어려우나 지나가듯이 한번 알고 지나가면 좋을 학자여서 남깁니다. )

루돌프 스멘트 저, 저명한 구약학자 15인의 4번째 인물인 ‘드 베뜨’



제 4장 빌헬름 마틴 레베레흐트 드 베뜨 (Wilhelm Martin Leberecht de Wette) 1780-1849

율리우스 벨하우젠 (Julius Wellhausen)이 칭찬하고,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말년의 그의 동반자이자 조수였던 드 베뜨. 빌헬름 마틴 레베레흐트 드 베뜨는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튀링겐 주의 신학자 가문 출신이다. 1780년 1월 12일 출생. 젊은시절 그는 쉴러의 열성적인 숭배자였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감독으로서 문법학교를 감독하던 헤르더와의 개인적인 만남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예나 법학부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곧 철학과 신학부로 변경했고, 셀링의 강의를 듣고, 칸트의 저작에 영향을 받고,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에 대한 연설들’을 읽고 ‘신학연구사상’이라는 첫 신학적 저술을 작성했다. 그 ‘신학연구사상’은 21살에 드 베뜨의 신분을 확립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대로 종교와 신학의 조건 곧 정통체제의 쇠퇴, 도덕에 의한 신앙의 대치, 역사적 연구의 시도, 새로운 신학을 찾기 위한 철학을 묘사한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일종의 개종(회심)이 뒤따랐고, 자연에서도 역사적 경험에서도 신의 활동을 보며, 도덕성을 선호하여 버렸던 신앙과 은혜의 교의조차 다시 많은 것을 얻으며, 성경으로 돌아섰다. 하나님을 향한 불멸성에 대한 신앙으로의 교체했다.

예나에서의 드 베뜨의 신학공부는 특히 구약성서를 지향했다. 그는 세 명의 교사 즉, 1)요한 야콥 그리스바흐 2) 하인리히 에버하르트 고트로프 파울루스 3)요한 팔립 가블러에게서 배웠으나 그의 첫 저작은 그들과 독립적이었고, 만일 동시대의 누군가와 비교한다면 요한 고트프리트 아이히호른( J.G.Eichhorn)이다. 아이히호른은 맹목적으로 성경을 변호하며 이적적이고 초자연적인 특징을 지닌 정통주의와 이런 특징 때문에 성경을 제쳐놓은 계몽주의에게서 고대 사람의 역사와 문화의 독특한 문서로서 성경을 이해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드 베뜨의 성서 전승 이해를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는 크리스티안 고트로프 하이네 (C.G.Heyne)의 ‘신화’라는 개념이었다.

젊은 베뜨는 ‘신화’라는 용어를 급진적으로 사용했다. 성서 재료에서 가장 초기의 이스라엘 역사를 재건하려는 아이히호른과 다른 시도에 그는 맞섰다. 그는 우리가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다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을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다양한 가설을 통해 맞추어지는 역사적 핵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드 베뜨는 역사가는 오직 한가지 가능성 즉, 이 분야를 포기하고 구약성서의 본분 곧 독자들에게 종교를 일깨우는 종교의 증언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드 베뜨의 구약성서 역사비평은 성경을 반대하려는 목적을 가지기 보다 , 오해를 규명함으로써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성경의 진실한 유용성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라틴어 논문 “오경의 첫 책들과는 다른 저작이며, 다른 한 사람 곧 후대의 저자의 저작임을 보여주는 신명기의 비평적-주석적 논문” 이 있다. 드 베뜨는 신명기가 모세의 것이 아닌 훨씬 후대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양식과 내용에 앞서 발간된 책들과 수많은 관점에서 빗나가 있고, 그것은 오직 후대의 다른 시대에서 유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개별적 요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의 장소의 일원화’이다. 신명기에 따르면 제사들은 한 장소에 제한되어야 하는데, 이른 시기의 책들은 많은 제의 장소들이 병행해서 존재함을 알고 허용하고 있다. 이는 그 구성이 요시야 왕때 즉 모세 후 500년으로 옮겨져야 함을 의미한다.

“오경에 대한 파터의 고찰에 대한 부가”라는 그의 기고는 당시 구약학계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저작이 되었다. 오경 율법의 노선을 따라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역대기서는 독립적인 역사서로는 아무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첫째 권에 있는 증거이며,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에 더 진정성있는 초기 자료들이 있다고 제시하지 않으며 모세로부터의 기원에 의문을 제기한다. ‘외적’ 비평에 이어 둘째 권에는 ‘내적‘분석이 나온다. 이것은 많은 개별적 이야기와 법적 구성 요소들로 보충하면서 개별적인 작은 이야기와 법적 구성요소들로 보충하면서, 고대의 서사시로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최종이면서 최신 부분으로 신명기를 추가한 하나의 큰 해설로 오경을 설명한다. 그 이야기들은 주로 종교적 내용을 지닌 신화들이다. 여기에 역사가를 위한 것은 거의 없지만, 심미적 종교적 명상이 있다.

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로 지내면서 요한 크리스천 빌렐름 아우구스티와 함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의 학문의 절정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슐라이어마허와 마르하이네케와 더불러 첫 신학부 트리오를 구성했을 때이다. 그의 신학은 결정적으로 야콥 프리드리히 프리스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후 ‘신프리스 학파’는 ‘종교적 선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성서적 기독교적 종교의 차별적이고 비평적 제시를 떠맡았다. 관례적인 출현 형태를 주요사상들에 나타나는 열정,겸손, 헌신과 같은 근본적인 종교적 감정표현을 합리적 상징적 신화적 방식으로 해석함으로 외부자들의 공격을 상대화시켰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나 생략) 이후 어떤 특정한 상황이라면,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베뜨를 , 누군가가 이런 자는 선생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베를린 교수직에서 해임했다. 이후 1821년 성 캐서린 교회의 목사로 임명받으나 무산되었고, 바젤대학에 초청받았다. 바젤시절 주요한 저작은 ‘신약성서의 간략한 주석 핸드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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