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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다

내 안에 사는 이

지난 11월22 일 설교입니다



설교 제목: 내 안에 사는이

빌립보서 1:19-26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 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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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밤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은혜를 주실 뿐아니라
이 나라와 이 민족과 세계 열방 가운데 일하시는 밤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기쁨의 교회 성도 여러분!
‘성도’라는 단어를 정의한다면 , 여러분은 성도를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사실 이것을 참 다양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에 근거해서 성도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자면요,

성도는 세상 속에서 단 하나의 소망을 품고 그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세상 속에는 참 많지만,
우리의 마음을 드려 오직 하나의 소망을 견고하게 붙잡으며 나아가야합니다.
모든 역경과 장애와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한 소망이 더욱 더 깊어지고 또 넓어지고,
선명해지고 온전해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바울의 이 귀한 고백은 바울 자신의 경험과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제 고백이 되어야하구요,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바울은 참 훌륭한 사람이구나”하면서 우리가 이 본문을 읽는다면,
오늘 우리가 읽는 이 본문내용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성도의 단하나의 목적이자 바울이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20절과 21절 말씀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라 합니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0) .
그에게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요 바로 그의 몸 속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 그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이자 소망이었습니다.

아까처럼 누군가 이렇게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사도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니까 그 삶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자리로 이끄시고, 예배하게 하심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바울만 택하셨습니까,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바울만을 특별히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만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여러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부르십니다.

너희는 내가 택한 족속이다.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나라이며 내 소유가 된 내 백성이다.
내가 이렇게 함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서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한 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함”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야합니다.
우리의 삶도 바울처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요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왜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무뎌져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존귀하게 되셔야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진심으로 마음 속 깊이 선포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의 삶이 처음부터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그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으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요.
분명 그것은 거짓된 열심이었습니다.

그의 눈이 가리어지고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 갑자기 자신이 자랑하고 열심으로 행하던
모든 것을 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삶 가운데서 함께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랑하셔서 바울과 동행하시고
그의 삶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이것부터가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함.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21절에서 고백합니다.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모든 것이, 내가 살아있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그저 하나님의 은혜다.
그렇기에 내가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유익하다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요 바로, 바울이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없다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 일은요. 성경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구약성경을 살펴볼까요? 이스라엘의 사람들에게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정체성을 이루어준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 사건은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압제 속에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호소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2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여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아멘.

먼저 우리가 기도하니까요,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셨고,
우리를 하늘에서 돌보셨고, 우리를 바라보시고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이 사건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3대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을 통해서 그들은 이 사건을 늘 기억합니다.

현대 유명한 구약학자 중 한명인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사람은요.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법(law)’과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예를 들어 방금 이야기했던 ,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 삶을 이끌었던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정체성’의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이 없이는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더 나아가 하나님과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율법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우상을 숭배할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바울과 사도들을 통해 그 복음이 우리에게 까지 전달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빌립보서와 같은 서신서에 담겨 있는 가르침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법과 같은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 바울의 삶 속에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그것으로 그치는 말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바울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바울이라 할지라도요 ,

여전히 그의 인생은요 수많은 아픔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육체에는요 가시가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돌로 맞고 배를 타고 선교를 떠났더니 배가 3번 파선당하고 일주일을 깊은 바다에서 지낸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삶과 죽음이라는 판결의 갈림길 가운데 서 있습니다.

여전히 그의 인생은 어쩌면 수많은 얼룩으로 얼룩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가운데 함께하시는데 왜 그는 이러한 수많은 고통 가운데 있을까요
이를 설명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이유들은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위로 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바울은 그에게 있어서 죽음과 삶 가운데 무엇이 더 좋은지 모를 정도로 괴로움을 겪고 있던 것 같습니다.

22절-23절 말씀 제가 한절 여러분이 한절 읽어보겠습니다.

22 그러나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아멘

육체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내 일인 것을 알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내가 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그냥 죽는 것이 옳는 일은 아닌지,
나는 도저히 결정하지 못하겠다. 내가 죽음과 삶 가운데 끼어있으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것은 사실 바울의 마음 한켠에 담겨 있는 소망입니다. 인간적으로 연약한 소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바울을 믿음이 없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요, 그가 사도이기 전에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완전한 신이셨지만 또한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올려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지난 13일 다니엘 기도회 “박광식문화선교사님”이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시더라구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너무 멋진 기도 하셨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 기도를 밤새 울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밤새 기도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 내가 죽게 생겼는데 잠이오니? 라고 하고는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좀 치워주세요. 아버지 하실 수 있으니까 이 잔좀 치워주세요 너무 두렵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도 대단한데 하나님을 한번보시길 소망해요 . 아들이 살려달라고 하는데 이 사형집행을 멈추지 않아요.
난 널 죽일거야 왜냐하면 내가 하고싶은 게 있거든,
아들이 살려달라고 하는데 아들을 죽이려고 작정한 이 아버지는 꿈쩍을 안하셔요.
등에서 채찍을 맞아서 살점이 날아가는데 아버지는 꿈쩍을 안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 왜 날 버리셨습니까?’라고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꿈쩍을 안하십니다.

왜죠?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고 싶은 일은,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보다, 바로 우리를 더 사랑하셔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의 정체성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이라는 정체성이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3절-24절에 이렇게 말하지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에게 있기보다도 , 또 바울 이라는 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향해 있어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바울이 지금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님께 가고싶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알기에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25절과 26절 말씀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함이라” 아멘


바울은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 중요한 일은요
25절 나타난 것처럼,
바로 복음 전파를 통해서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는 일이며, 우리를 기쁘게 할 일입니다.

어? 25절에는 믿음의 진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있지, 복음의 전파는 나타나지 않는데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니다만
여기서 진보와 전파는 원어성경을 보면 동일한 헬라어 ‘프로코펜’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믿음의 전파”는 12절에서의 “복음의 진보”와 직접적으로 대응합니다.
이것은 인클루지오라는 고대의 익숙한 문학적인 기법인데요.
마치 괄호를 치듯이 비슷한 표현이나 개념으로 이 부분이 한 단락임을 표시해주는 표현입니다.

즉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만약 우리의 믿음이 진보한다면 그를 통해서 복음의 전파도 일어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츰 더 풀어나가겠습니다.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요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각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자랑이 더욱 풍성하고 많아지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 바로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더욱 풍성하고 많아지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는 그것에 맞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 모든 물건은 그 목적에 맞게 쓰임받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통상 그렇게 행하지 않습니까?
편지를 통해서는 우리는 그것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음식으로는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의 만족감을 채웁니다.

한편,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를 그분의 토기로 표현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토기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통해 어떻게 드러납니까?

바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자랑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에게는,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요즘 세상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영광도 세상 가운데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어찌 세상에 충만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원인이 과연 하나님께 있을까요? 아니요, 그 이유는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그 목적을 이루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었고, 예수님께도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습니다.

저는 이 이유가 우리의 삶의 가장 큰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보다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눈물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보셨습니까? 아니 그정도까지는 못하더라도 정말 간절하게 기도해보셨는지요.

얼마 전에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송시복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전교 꼴등이었던 그가 서울대학교를 갔다고 합니다. 고3때 수업시간을 빼고 11시간을 공부했고 이틀에 한번 밥을 먹었으면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방송에서 송시복 어머니는 “애가 너무 힘들어서 우는데 눈에서 피가 났다고 눈에서 피가 나는 건 처음봤다고”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아 정말 예수님께서 눈에서 피가 나도록 기도하신게 정말 과장된 말이 아니라 , 그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셨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우리의 칼과 방패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고 주가 살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산다면, 육체의 열매 맺으며
내 안에서 주가 산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으리

나는 죽고 주가 살고 나는 없고 주만 있으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나라 이루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안에 내가 산다면 우리는 육체의 열매를 맺고,
내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내 육체의 능력으로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큼만의 열매를 맺으며,
주님의 능력으로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증거가 다윗의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이스라엘을 조롱했을 때,
사울은 누가 그를 물리칠까 걱정하며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에게 자기의 군복과 갑옷과 칼을 채워주었지요.
그런데 다윗은 그것이 오히려 익숙하지 않았기에 자기의 손에서 막대기를 자기고 매끄러운 돌 다섯개를 챙겨갔습니다.
분명 전쟁은 돌맹이 5개보다 칼과 방패에 달려있는 것이 우리의 눈에 명확해보이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그의 전쟁을 하나님께서는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즘 제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 제목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제 주변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더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내가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을 알아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그들을 위해 기꺼이 울 수 있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에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을 통해서 분명히 역사하시는 분이시기에,

여러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바라본다면
내 마음이 너무나 감격스러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나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역사하신다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며,
어찌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일 아닙니까?

나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아닙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저는, 바울도 저와 비슷한 마음으로 이렇게 그들과 함께하며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살고,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낀다면, 내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이 더 깊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낀다면,
26절 말씀처럼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진보이자 복음의 진보가 되고 우리의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하나님을 사랑하시길 소망합니다.
더 하나님을 붙드시며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핵심 구절은 21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시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저는 정말 이런 사람과 결혼해서 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분은 바로 행복한 교회라는 표어를 가진 한성교회의 “김윤진 간사”님이십니다.

저는 공부를 할 때면 종종 이 간사님의 찬양을 듣습니다. 이번에 11월 13일에 금요 찬양집회를 간사님께서 인도하셨는데, “
내 안에 사는 이”라는 찬양을 부르시고 기도를 인도하시면서 남기신 멘트가 제게 참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안에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면,
우리의 실패도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고통도
그리고 우리의 죽음까지 모두 유익한 줄 믿습니다.

우리의 생애가 주님의 시간, 주님의 흔적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하시고
세상과 다른 선택을 하게 하시고
세상이 알 수 없는 감사를 드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말이 다른 자들의 믿음의 삶을 축복하여 주시고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이번주 내내 매일 기도할 때면 이 말씀을 붙들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고통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의 선택이 주님이 되신다면,
우리가 세상과 다른 선택을 한다면요,
그 선택을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우리가 세상이 알 수 없는 감사를 드리며,
세상과 결말이 다른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바라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길은 우리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음을 압니다.
주님께서 그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할 줄 압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박국 3장 17-19절 말씀을 읽고 말씀을 마치고 싶습니다.
아마 모두가 다 익히 들으신 말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아멘.


사랑하는 기쁨의 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기쁨이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
이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와 같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충만하기 소망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드리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