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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다

성결, 은혜가 은혜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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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과자를 사달라고 이리저리 난동을 피우며

어처구니 없는 떼를 쓰는 모습을 보게된다면,
우리는 그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어쩌면 누군가는 장난을 치는 그를 보며 어이가 없어서 웃기도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나와 그를 아는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볼까 쪽팔려 자리를 피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결혼식에는 결혼식에 맞는 예복을 입을 것을,
예배당에서는 말끔한 복장과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참여할 것을 요구받는다.
자신의 격식에 맞는 복장과 행동을 갖추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 나는 오랜시간 이런 생각을 했었다.
모태신앙으로 늘 교회와 동행하며 살아왔던
나는 설교를 통해서 이런 복음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여러분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으니 우리는 그 옷에 맞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 자신도 거룩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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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를 참 오래 다녔지만
이렇게 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가 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내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죄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내 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깨끗해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사실 내게는 그저 사변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내 마음 속 깊이 감동으로,
내 삶을 변화시킬만한 은혜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삶과 복음의 괴리감이라고 해야할까..

성결교단의 주요 교리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성결’에 대한 문제,
즉, 늘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은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은혜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의무’이자,
하나님께 내 죄를 깨끗케하신 은혜에 대한 ‘나의 보답’이라는 측면으로
몹시.. 매우.. 많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교회에 처음 다니는 성도들은 오죽했을까?

그러나 최근에 한가지 예시를 듣고 그동안의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은 톰라이트의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서신”에 나타난 한 예화다.





“며칠 전 , 존은 여기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의 중고품 가게에 들렀다.
특별한 무엇을 찾고 있었는데, 잠시 둘러보다가 바로 그것을 보았다.
지름이 20센티쯤되는 우묵한 그릇이었다. 분명 누군가 꽃을 꽂는데 사용했던 것 같다.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했고 잎이 몇개 남아 있었다. 또 한쪽 면은 길게 금이 가 있는 듯 보였다.
가게 주인은 아마 이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 같다.
가게는 이미 다른 오래된 물건들, 책들, 병들로 가득차 있었으니 누구인들 알았을까?
존은 그 그릇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자신이 기뻐한다는 것을 숨긴채 계산대로 가 그것을 샀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가져가 깨끗이 씻었다. 존은 그 그릇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 그릇이 아주 훌륭한 자기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 가게 주인은 분명 몰랐을 것이다)
존은 금이 간 부분을 보수했다. 또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며 한 일이 있다.
그릇에 묻은 먼지와 흙을 닦아 내고 그것을 새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귀한 자리에 두었다.
그곳에는 아주 멋진 장식용 달걀 3개를 두었는데, 서로 어울려서 효과가 극대화 되었다. 그가 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다음 날 그 그릇의 원래 주인이 중고품 가게에 나타나,
다시 꽃을 꽂는데 쓰고 싶으니 자기 그릇을 돌려달라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가게 주인은 그를 존에게 보낼 것이다.
하지만 존은 그 그릇은 이제 없다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그가 그것을 샀기 때문만이 아니라, 안팎으로 깨끗이 닦았고 꼭 맞는 완전히 새로운 용도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꽃 몇 송이 꽂아 두는 데 사용하는 일은 부당할 뿐 아니라 그 그릇에 모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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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은 거룩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나 의무의 차원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보다는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있다.
새그릇은 새그릇답게 사용되어야한다.
이것이 거룩의 의미이며, 속량의 의미이다.

우리는 중고품 가게의 지저분한 물건처럼 ‘되사옴’을 받았다.
우리는 본래 지음 받은 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저 꽃 몇 송이 꽂아 두는 데 사용하는 일은 부당할 뿐아니라 그 그릇에 대한 모욕이다.
이것이 일종의 나를 향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 의무로서 ‘성결’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존재에 맞는 행동을 , 거룩을 지켜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룩의 진짜 의미이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나도 거룩해야한다는 일방적인 의무로서의 거룩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모든 차원에서 소중한 나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또 세상에서 나를 통해 드러나실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구별되는 것이 바로 거룩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두 차원이 서로 잘 이야기되야만한다고 생각한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반드시 강조되어야만 하지만 ,
내가 당신의 삶에서 거룩함을 유지할 것만을 강조하면 그것은 ‘율법’이 된다.

구약의 율법의 그 선한 의도와 용도와는 상관없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의무이자 위선으로 썩어질 폐습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은혜에도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런 위험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거룩은, 속량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당신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은혜의 측면도, 영광의 측면도 어느 쪽도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

나는 사람은 참 간사해서 어떠한 진리가 , 혹은 그 사실이
내 마음에 와닿고 스스로 감동이 있지 아니하면
지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전심으로 그에 걸맞는 행동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절대 은혜가 내게 의무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도 맞고
나 또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한다는 사실은 맞지만
그에 대해 마땅한 보답으로 또 의무로 성결함을 유지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번 글의 요점이다.
내가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당신은 분명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을 분명히 증명하셨다.

당신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 것은
당신 스스로를 향한 모욕이자,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다.

소중한 너이기에, 사랑받는 너이기에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함, 속임수, 증오, 적개심, 험담 그 외의 모든 악한 것들을 우리에게서 제해야 한다.

깨어진 그릇이 새 그릇이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택함 받은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자,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백성이다.


마태복음 10:28-31

28 그리고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 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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