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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다

5장 히타이트인- 해리 A. 호프너 (Harry A. Hoffner Jr.)

5장 히타이트인 - 해리 A. 호프너 (Harry A. Hoffner Jr.). (고대근동문화 5장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역사
1)역사문헌

히타이트인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그들에게는 자신의 연대기를 기록한 문헌이 없다.
구 히타이트 왕인 핫투쉴리 1세와 텔레피누 그리고 신 히타이트의 왕 핫투쉴리 3세의 칙령과 같은 왕의 칙령이 종종 역사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2)구 왕국이전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인이 언제 아나톨리아로 갔는지는 모름.

3) 구왕국

1750-16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 (목록이 남아있다)
구 히타이트 시대에 히타이트 왕국은 대외확장을 함. 무르실리 1세 통치기간동안 바빌론 1왕조를 종식시킴 ( 1595년)

4) 신 왕국

대외 확장의 가장 위대한 시대는 슙필루리우마 1세 (Suppiluma)의 즉위 (1344년)에서부터 그의 손자 핫투쉴리 3세( 약 1239년) 치세 말까지 수백년 동안 일어났다.
이 시기동안 히타이트인은 멀리 남부 다메섹까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유지했다.
이집트와의 동맹. 그러나 후에 그들의 안정을 위협하는 신흥세력이 활동함.
살만에셀 1세와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이끄는 아시리아는 북부의 인근 국가들에 공격적으로 나타남.

2.언어와 서법

1)언어
(1)인도-유럽 어족 기원

히타이트어는 루비어나 팔라이어와 같은 고대 아나톨리아의 인도-유럽어족과 여러 언어적 특징을 공유함.

(2)비-인도-유럽 어족 특성들
비록 문법적 구조가 인도-유럽어족이긴 하지만 아나톨리아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서 만난 민족들로부터 상당량의 어휘를 채택함.
동식물의 이름이나, 특별한 사회적 신분이나 전문직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그렇다.

(3)발달

1650-1180년까지 수세기 동안 히타이트어가 통용됨.

2)문자표기법
(1)파생 (2) 적응 (3) 통시적 국면

3.고고학 유적

역사와 문화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지는 고대 핫투샤(히타이트 수도)
1960년대를 통틀어 핫투샤 발굴결과를 가장 잘 소개한 책은 비텔의 “핫투샤:히타이트의 수도”이다.

4.문서 자료
1)설형문자 토판 (도장의 명각들을 포함)
2)상형문자 명문

5. 물질문화

1)농업 -몇가지 곡물과 다양한 과일과 채소 (콩, 병아리콩, 렌즈 콩, 오이, 양파, 마늘 파)가 재배됨. 양봉으로 꿀과 밀랍. 포도주 음료는 건포도와 함께 생산. 맥주제조.
2)가축-소고기, 돼지 기름, 우유, 치즈. 가죽과 뿔.
3)식품보존- 눈과 얼음을 모아 보관함. 말려서 보존하기도 함.
4)건축과 도시계획
5)야금술- 히타이트인이 철기기술의 고안자이기에 그것으로 군사적패권을 잡음. 청동갑옷. 철을 무기제작으로는 사치로 여김. 거의 사용되지 않음.

6.사회
1)구조
(1)왕
사회계급 정상에는 ‘왕’이 있음. 이집트의 파라오나 메소포타미아 일부 왕이 신성을 주장한 것처럼.
히타이트 왕들은 살아있는 동안 ‘신’으로 여겨지지 않음. 그러나 왕이 사망했을 때는 사람들은 그가 ‘신’이 되었다고 말함.

왕은 신들이 정한 섭정이었다. 신들의 소유인 백성과 나라의 운명은 왕이 그 신들을 얼마나 잘 섬기는지
그리고 행정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달려있었다.
이것이 왕의 인격에 존경을 보장하고 그의 행위에 엄격한 요건을 부과함.

국가의 최고 제사장으로 왕의 인격은 거룩해서 항상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으 보호해야했다.
주요 종교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먼 전쟁터에서라도 돌아와야했다.
종교예식을 진행할때면 왕은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태양신의 모자를 쓰고 예복을 입었다.
그 나라의 최고 재판관으로 왕은 죽음의 형벌을 요하는 중대한 사건을 심리함.

(2)왕후
구-왕국에서는 왕후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신-왕국에서는 상당한 위세를 떨침. 왕과 왕후는 공동인장을 사용함.
모든 왕후는 아니지만 일부는 남편의 직책인 대제사장직에 상응하는 여대제사장의 직책을 지님.
이런 지위로부터 그들은 상당한 양의 신전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다.

(3)왕자
왕의 어린 아들만을 포함하지 않음. 나이와 관련없이 와의 모든 남자 후손이 포함.
왕은 통치기간 중 어느 시점의 자신의 아들중 하나를 보통 장남을 왕세자로 지명함.

(4) 귀족
대가족이라는 용어는 구왕국 초기에 왕의 확대가족 즉 혈연친족을 가리킴. 이 공급원에서 왕이 그의 왕국의 모든 고위 공직자를 공급함. 그렇게 지배계층을 만듬.
그들은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어린시절에 그의 교육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맡음.
히타이트 왕의 성품은 항상 자비가 특징이 되어야 했던 반면, 그의 사법적 관용은 특히 이 대가족의 구성원들에게만 적용됨.

(5)자유민
현대 서구적 개념의 자유보다는 훨씬 포괄적. 그러나 ‘자유로운 것’과 ‘자유롭지 못한 것’ 을 구분함. 강제납입과 의무에서 면제된 사람은 거의 없음.
자유민으로 불렸던 소수만이 한 쌍의 의무인 “샤한”과 “루찌”라는 의무납입에서 면제됨.
일반적으로 자유민은 상급자의 승인 필요없이 매매 , 계약, 거주지의 이동 및 결혼과 이혼이 가능함. 물론 비자유민에게는 적용되지 않음.

(6) 가정 또는 개인노예

비자유민의 가장 확실한 유형은 개인노예. 그는 주인의 재산이었다. 노예가 상해를 입힌다면 주인이 그 상해를 보상하거나 노예를 잃도록 요청함.
노예에게 가해진 상해에 대한 배상은 주인의 몫. 얼마간 사유재산을 획득한 노예들의 능력도 나타남.

(7)공공노예
‘아르누왈라쉬’는 본래 난민, 외국인 전쟁포로, 이주노동자 또는 농장이주민으로서 일하는 사람을 뜻함. 왕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그들을 배정함.

(8)외국인
수도에는 항상 외국 대사들의 작은 공동체 또는 임시 외국인 거주자들이 있었을 것.
이들은 하티의 시민이 아닐지라도 상류계층이었으며 왕의 친척이었고 모종의 권리와 특권을 소유함.

2)법률
3)국정운영

히타이트의 국정은 ‘법치’
모든 시민을 통치한 법전 외에, 국가의 모든 주요 관직을 관리하기 위한 “규정서”가 있는데 그 중 일부만 “교훈자료”라는 형태로 남아있음.
히타이트 조약은 히타이트 학자들뿐만아닌 비교적 전문가와 구약성경학자와 같은 다수의 외부학자들에 의해서도 지난 반세기동안 집중적인 연구대상이 됨.
히타이트학자들은 히타이트권역의 여러국가들과 외부 강대국 간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가짐.

비-히타이트 학자들은 이 자료들을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온 비슷한 문서들과 비교하고
그것을 조약과 언약문서 해석과 연대 설정한 유용한 양식비평도구로 봄.

히타이트 조약의 구조와 구약성경 언약 형식의 구조가 가장 근접했던 시기는 (슙필루리우마 1세, 무르쉴리 2세와 무와탈리 2세의 치세였던) 약 1344년-1271년.

문학형식은 다음과 같음

1.화자의 소개 2. 역사적 서언 3. 계약조항들 4.조약문서에 관한 진술 5.신의 증언 6.불이행에 대한 저주와 이행에 따른 복

4)군사
5)신전과 제사장
-마을의 제사장은 귀족혈통에 속하지 않은 비교적 하류계층, 대도시 신전의 대제사장들은 때론 왕족혈통이며
왕위를 계승하기 적합치 않은 동생들.제사장은 결혼할 수 있었고 세금과 강제노역에서 면제됨.

7.종교
1)신화
이들의 언어가 인도-유럽어의 파생어라 할지라도 대규모 혼합집단인 히타이트인은 문화의 모든 면에서 전혀 인도-유럽어족이 아님.
신화의 경우에 분명한데 인도-유렵유형이 하나도 없다. 보통 3그룹으로 분류됨

1.하티인-아나톨리아인 2. 후리족-메소포타미아인 3. 아시아인

2)제의
수도를 위한 제의행사달력이 존재함. 각 신전마다 매일제의가 있었으나 축제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이때 매우 다양한 희생과 제사뿐 아니라 신상이 거리로 가는 행렬 중에 옮겨지고 음악, 춤, 곡예와 운동경기로 신을 즐겁게 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주요 절기들 외에도 엄숙한 안식일과 월삭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히타이트인에게는 안식일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가장 반복된 그들의 축제는 “달의 축제”인데 아마 새 달을 기념하는 축제일 것.
히타이트의 대부분의 계절 축제는 봄과 가을에 경축하는데 농작물의 파종과 수확이 그 특징임 .

3)마술의식

8.구약 성경과 문화적 문학적 유사성
히타이트학이 시작될 때부터 구약성경의 히타이트인은 중앙 아나톨리아의 보아즈쾨이-핫투샤에 그들의 수도를 둔 바로 그민족이라고 추정함.
그러나 2가지 의문점이 있다. 1. 히타이트라는 이름의 사람들 또는 헷의 자손들이 북쪽에서 온 외국 민족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성경기자들의 의도였는가?
2. 구약성경시대에 실제로 북쪽에서 온 그 히타이트인이 팔레스타인에 존재했다는 것이 믿을만하고 그럴듯한가?

여러 구약학자들은 첫째 질문에는 인정하고 둘째질문에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히타이트 인에 대한 언급들, 특히 창세기 족장 이야기에서 언급하는 것들을
이스라엘 왕국시대 (약950-700년)에서야 알려진 히타이트인을 이른 시기로 앞당겨 기록한 시대착오로 간주함.

첫 질문에 그렇다와 아니다로 답하며 이제 세번째 관점을 제시함.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히타이트를 언급한 구절들은 거의 확실히 14-13세기에 히타이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신-아시리아 왕들의 연대기에서 지금도 하티(Hatti)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는 시리아인 왕국들을 말한 것.
그러나 창세기-여호수아서에서 언급되는 히타이트인은 본토 팔레스타인인이고 가나안인, 여부스인, 아모리인 등과 함께 언급된 집단의 하나이다.
그들 개인의 이름은 서부 셈어이고 그들의 관습에는 아나톨리아인과 관련지을만한 증거가 없다.
그들의 혈통이 함의 후손인 가나안의 아들, 헷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창세기 10장에 보존된 전승은 확고하게 그들의 기원을 팔레스타인에 둔다.

구약성경 초기의 히타이트인이 아나톨리아 초기 제국 문화의 산물이든 아니든 간에 구약성경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문화로부터 온 세력을 보는 것은 가능하다.
히타이트인과 구약성경의 관한 연구들. 공통된 문화적 단어들. (포도주, 투구,모자, 참깨,상수리나무,유약,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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