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역 단상

불안한 미래에 용감하기




   보장된 미래가 있을까? 보장할 수 있는 미래는 있을까?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들은 오늘의 삶의 무기력하게 만들고, 내일의 삶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들은 현실로부터 불안하게 만든다. 코로나가 그랬던 것처럼,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지만 위기로부터 한없이 추락하는 사람도 있다.

   폴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비존재의 위협을 받는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의 차이를 생물학적 논의로 풀어가며 이 둘의 결정적 차이를 대상에서 찾는다. 두려움은 대상을 갖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미래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불안은 인간 생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불안을 두려움으로 변형시키는 것뿐이다. 대상이 없는 것을 대상이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뿐이다. 인간은 대상이 없는 미래의 불투명성 속에서 초조해하며 기껏해야 그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려움이라는 대상으로 만들어 용감하게 극복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일까? 2005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아주 현대인들이 겪는 불안이라는 위협을 사회적 지위와 연결시켜 현상적인 측면을 연구하였다. 현대인들의 불안에 대한 적나라한 현실들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 너무 통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문학적 통찰과 해답에 있어서는 다소 한계를 지니지 않았나 싶었다. 철학과 예술, 문학과 종교, 사회적 집단 등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적인 불안을 해결할 수 있을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처럼 보인다.

   불안이라는 것은 때로는 우리 사회에 혹은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불안이라는 것은 삶의 동력을 심어줄 때도 있으며, 답답한 현실을 더욱 용감하게 살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불안이라는 문제가 갖는 의미가 본래적으로 또한 기독교적으로 죄의 문제(키에르케고르)이며 비존재의 위협(폴 틸리히)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현재를 어떻게 용감하게 극복할 것인지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때로는 암담한 현실과 걱정 속에서 말이다.

   불안한 지금의 현실에서 삶을 보다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존재는 허무한 피조물이 아니다. 불안이 주는 고통의 늪의 결정된 존재로서 자유를 빼앗긴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세속적 허무주의를 그리고 비참한 현실을 담담히 살아가야 하는 그 어떤 숙명론도 거부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무능력한 인간이 아니다. 빅터 프랭클에 의하면 “인간은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신학을 하는, 신학을 생각하는, 목회자의 부르심을 따라 걷는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이로부터 오는 현실의 막막함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과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체험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참 다운 존재를 인식하고 내 앞에 주어진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 앞으로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 현실을 당당하게 마주한다면 우리의 작품은 하나님 보시기에 걸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역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야할 바  (3) 2021.07.27
거절이 잘못은 아니다  (3) 2021.07.20
사진의 테이크 어 미니스트리  (4) 2021.05.27
이어지길 원하지만 단절되는  (3) 2021.05.27
사역의 중요한 가치  (3) 202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