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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 단상

거절이 잘못은 아니다

 

     사역지를 정할 때 참고할 만한 점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봤다. 솔직히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 또한 군대를 전역한 이후에 교회 사역을 바로 하지 않았으며, 이제 신학대학원을 앞두고 사역지를 찾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부에서의 사역 경험과 지금까지의 내게 있었던 일을 비추어보면서, 사역을 앞둔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점을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어떻게 본다면 이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본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신학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중·고등학생’이거나 ‘신학생’이라면 (아니, 평신도라도 상관없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바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에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님뿐만 아니라, 당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 목사와 평등하고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교회 구성원 중에서 누구 하나 더 잘난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

 

     나는 사역지를 찾으려는 신학생이 이러한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고용주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그게 무슨 믿음이 부족한 말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막연하게 짐작하곤 했다. 그러나 신학생에게 ‘목회와 사역’은 현실적인 문제다. 열정과 패기, 노력, 믿음… 모두 다 좋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끝까지 버틸 만한 사역자는 적어도 내가 알기론 없다.

 

     실제로 겪어본다면, 사역에 맞닥뜨린다면 깨달을 것이다. 신학생의 사역은 결코 ‘이전에 자신이 체험한 은혜’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목회자와 성도’ 간의 관계와 ‘고용주 목회자와 피고용인 목회자’ 간의 관계는 똑같지 않다. 더 많은 책임과 준비, 자질, 시간 등이 필요하다. 이제는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편, 그동안 단상 앞에서 보았던 목회자의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겉과 속이 다른 목회자도 어딘가엔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생 2학년 때 처음 사역을 시작하였다. 사역하기 전과 후에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바로 ‘교회를 의무적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연 내가 믿음이 부족해져서, 신앙심이 감소해서 그런 감정을 느낀 걸까? 학창 시절에 공부해봤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공부하려고 할 때와, 부모님 혹은 선생님이 시켜서 하는 공부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사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발적으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경우와 사역자로 교회에서 일하는 경우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에게 가장 잘 맞는 교회’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쉽진 않을 것이다. 교회 사역을 시작했는데 후회감이 들 수도 있고, 사역을 한창 하고 있다가 ‘이렇게 지내고 있는 게 맞는 걸까?’라는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어떤 목회자는 이러한 감정이 소위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신학생이라면, 사역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이다. 자신의 미래와 앞날을 깊이 고민한다는 건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본인을 성찰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첫 번째 사역지를 구할 때, 항상 이런 마음을 품고 지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이라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일 거야.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가서 열심히 사역해야지.’라고 말이다. 열정과 패기, 겸손함은 칭찬할 만하다. 순수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련하지 못한 자세이기도 하다. 모든 기업의 고용주와 모든 교회의 목회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신입 사원을, 신입 전도사를 원한다. 톡 까놓고 말하자면 ‘을’이 되기에 딱 좋은 인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느 근무 환경에서도 ‘갑을관계’가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지어 군대에서조차도 이러한 ‘갑질’은 사라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P대장 공관병 갑질이 아니었던가? 결국, 그 대장은 보직을 해임당하고 구속 영장을 받기까지 이르렀다. 위계식 질서가 철저한 군대에서도 갑질은 제거의 대상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아직도 수많은 기업이나 사업장에서 갑질은 횡행하고 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갑질이 암묵적으로 발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사역지를 찾는, 앞으로 사역할 계획이 있는 독자들에게 제안한다. 사역지를 구하고 알아볼 때, 당신 또한 얼마든지 ‘교회와 담임 목회자 및 동료 사역자’를 선택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점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어느 사역지를 지원하기 전에 충분히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교회의 분위기는 어떠한지, 만약에 사역을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목회자들의 설교는 어떠한지, 급여나 복지는 어떤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누차 말하지만, 이러한 요소를 확인하는 과정은 절대로 ‘믿음이 부족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인 기업 입사할 때에나, 심지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확인하는 사항들이다. 이건 전적으로 피고용인인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이다.

 

     교회에서 구인 광고를 내고, 그것을 본 당신이 사역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하자. 교회 측에서 마음에 들어서 1차 서류 평가가 통과되고 2차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면접만 잘 보면 사역을 시작하겠구나’라고. 근데 여기서 당신이 보아야 할 건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당신이 마주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태도, 명시된 계약 사항(근무 형태, 조건 등)’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용담당인이 불친절하거나 하대하는 투로 이야기한다? 처음 본 날부터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대화해보니, 말이 잘 통할 것 같지 않다?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 명령과 복종을 일삼는다? 그렇다면 답은 자명하다. 설사 면접에서 통과했다는 문자 혹은 연락을 받더라도,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이는 전혀 예의가 없거나, 실례되는 일이 아니다. 엄연히 합법적인 권리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해당 교회에서 사역하기가 어렵겠다고 차근차근히, 친절하게 말해주면 된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친다면,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면서, 신속하게 마무리하고 연락을 끊어라. N년 동안 지옥에서 허우적댈 뻔했는데 살아난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교회와 담임 목사는 사역지를 구하는 당신을 뽑거나 뽑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 또한 가고 싶거나, 가고 싶지 않은 교회와 목회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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