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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봉

시간 망각(Time-less)의 체험

시간. 아마도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함과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자본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한 사회에서 이것 하나만큼은 구매할 수 없다. 배금주의가 아무리 횡행하더라도 시간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전 세계에 손꼽히는 거대 부호들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결국 소진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요소가 여럿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항목은 시간임이 틀림없다. 명예와 부와 권력과 학식과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신기루' 혹은 '그림의 떡'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영화 <인 타임>에서는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시간)으로 현금을 산다. 팔목에 착용한 '남은 시간 표시 장치'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호는 금고에 이 '시간 표시 장치'를 넣어둔다. 100만 년 어치의 팔찌 등으로 말이다. 시간이 없다면 돈을 포함한 이외의 가치를 누릴 수 없다는 점을 포착한 이 영화는 관객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오늘날 이와 같은 시간 구입과 매도가 가능하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말이다.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현대인은 없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시간이 소중하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나이 드신 어르신들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다. '그 시절에는 돈 주고라도 경험해야 한다.', '젊었을 때 잘 배워나야 나중에 고생 안 한다.' 라고 말이다. 이 글을 작성하는 본인과 아마 읽고 있는 대부분의 독자가 청년층이라고 생각하기에, 한번 젊은 이의 입장에서 대답해보자. 위와 비슷한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에게 당장 떠오르는 마음은 무엇인가? 물론 '맞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늘상 수긍해왔던 우리이다. 그런데 날카롭게 파고 들어가 보자는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1000만원, 아니 좀더 쳐서 1억을 준다고 하면서, 당신의 일주일을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거절하지 않는 청년이 과연 어디 있을까?

 

예시가 조금 과장되고 비현실성이 없지 않은 감이 있지만, 한 가지 명제만은 확실하게 도출할 수 있다. 바로 아직까지 사람들은 시간보다 돈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더 적확하게 표현해보자면- 돈이 없다면 시간도 의미가 없다는 사고를 종종 한다는 사실이다. 지갑과 핸드폰을 두고 외출하였을 때 느끼는 심리 상태를 떠올린다면 좀더 정확하게 이해되리라.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시간은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좀 더 중시되는 가치는 아직까지는 돈이다. 여기까지 소결을 짓고 잠시 고대인의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고대인들도 현대인이 느끼는 감정을 동일하게 체험하였다. 바로 시간의 중요성을 자각하였다는 의미다. 시간의 흐름, 즉 노화를 두려워하며 죽음을 기피하였다. 동시대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태고의 시절부터 논의되고 극복해내고자 하였던 문제라는 것이다.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한한 시간 내에서, 끊임 없는 시간의 흐름은 불안감이 엄습하도록 하는 데에 충분하였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가버리는 현실을 직시하며 말이다. 시간이 짓누르는 거대한 무게 앞에서 그들은 어떠한 행동을 선택하였을까?

 

루마니아의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고대인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를 찾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종교의 핵심을 '시간 망각-혹은 시간 없음-(Timeless)'에서 찾았다. 이는 곧 인간이 종교적 의례(Ritual)와 같은 형식을 통하여 시간을 잊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한다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떠한 행위'는 일반적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대인들은 종교적 의식과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시간 낭비'가 아닌 '시간 저축'으로 변화되어 인식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가 말한 종교 경험은 '무의미한 시간'을 '성스러운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상징적 의례를 지칭하며, 이는 '성현(聖顯, Hierophany)'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Mircea Eliade(1907~1986, Left) and Emil Cioran(1911~1995, Right)

 

현대인의 생활을 예로 들어보겠다. 가령, 어느 사람이 무료하고 무의미한 느낌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치자. (설령 그가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현재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상태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시간을 좀더 가치 있고 즐겁게 사용하고 싶어서 영화관에 갔다. 다행히 영화도 박스오피스 흥행작이라서 무척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약 2시간 동안 마음껏 몰입하고 집중해서 영화를 보니까, 그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으며 감동과 여운이 몰려온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단지 시간 죽이기(Killing-Time)로 치부하기 쉽지만, 엘리아데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상에서 '종교적 본질과 핵심'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엘리아데에게 있어서 시간으로의 몰입은 결코 시간 낭비 혹은 죽이기가 아닌 '시간의 망각', '시간 저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인간에게 유의미함(Meaningfulness)을 준다.

 

시간의 망각(Time-less)을 체험함으로써 종교적 본질을 경험한다는 엘리야데의 단언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함의를 던지고 있을까? 일단 본인에게는 그간의 시간을 '도구적 존재'로 사용하였음을 돌이켜보게 한다. 마치 '어느 한 시점'을 위하여 살고 있다는 생각을 깨뜨려주었다. 시험기간일 때에는 '아, 이 시험기간만 지나간다면', 군 복무할 시절에는 '이놈의 군대만 뛰쳐 나온다면', '~만 한다면' 등과 같이, 지금 이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왔음이 떠올랐다. 현재의 '시간 없음'을 누려도 충분했을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시간의 조건절을 붙이는 악습이 계속된다면, 그 꼬리는 평생토록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느니 차라리 '현재를 누리라(Carpe Diem, seize the day)'는 키팅 선생의 말처럼, 이 순간의 시간을 망각하는 변화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겠다.

 

시간이라는 가치가 '자본'을 이기기 위한 유일한 방법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돈으로 시간을 사라"는 현대적 아포리즘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현대 기술로는 시간을 무한정 부풀릴 수 없다. 이는 시간이 얼마나 더 흘러도 미지수인 일이다. 그러한 한계적 상황 앞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다. 현재의 시공간을 충분히 누리면서-시간의 망각을 체험하며- 살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도래할 미래만을 바라보며 허울 좋은 이상만을 좇으며 살아갈 것인가?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체념할 것인가?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선택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본 글은 2020년 1학기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학부 2학년 수업,

<종교학개론>(이길용 교수님) 강의 및 수업자료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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