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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움받을 용기 1 요약

미움받을 용기

one chapter
프로이트의 원인론 / 결정론
과거의 경험이 현재를 규정하는 원인이 된다. 이는 결정론으로서 동일한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현재의 동일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속박하고 지나친 허무주의 혹은 염세주의로 변질시킨다. 

아들러의 목적론
과거의 경험이 현재를 규정하는 원인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과거의 겪은 경험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현재를 어떠한 목적으로 설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감정에 지배되거나 과거의 경험에 의한 숙명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자유의지를 통해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아들러는 인간의 성격 혹은 기질을 생활양식이라고 표현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성격,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 세계관을 포함한다. 생활양식은 가정, 환경, 종교, 인종, 국적 등 다양한 것에 영향을 받으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 환경의 영향으로 인한 원인은 아니다. 생활양식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결정이 중요하다. 생활양식을 변화는 이에 따른 결과, 즉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 혹은 변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불만’ 중 하나를 고르게 만든다. 그래서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다. 아들러의 목적론은 과거와 상관없이 ‘지금, 여기’를 살게 만든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은 원인에 의하여 발발한 것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Two chapter
   인간의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고민한다. 만약 우주에 인간 혼자라면 논리적으로 고민 혹은 고독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개인의 내면적 고민은 조금이라도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열등감은 아들러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로써 독일어로는 가치가 더 적은 느낌이라는 뜻이다. 즉 열등감이란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열등감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일 뿐이다. 가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서 이를 벗어나려는 욕구를 아들러는 ‘우월성의 추구’라고 보았다. 이것과 대조되는 것이 열등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병이 아니라 제대로 사용되면 노력과 성장을 위한 자극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로서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어”와 같은 핑계를 대도록 만든다. 
   반면에 우월 콤플렉스는 거짓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여 나의 존재를 우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강렬한 열등감을 전제한다. 동시에 아들러는 자기 자랑은 열등감의 발로로 이해한다. 
   또한 불행 자랑이 있다. 이는 자신의 불행을 무기로 하는 우월감에 빠져 권력을 행사하여 타인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다. 갓난아이는 연약한 존재로서 어른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다.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속박 아래서 ‘경쟁’이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노에는 사적인 분노와 공적인 분노가 있다. 공적인 분노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다. 반면에 사적인 분노는 권력 투쟁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복수 단계로 진입한다. 이러한 사적인 분노에서 권력 투쟁에서 물러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경쟁과 승패의 안경을 벗어나는 것이 진정 자신을 바꾸는 지름길이다.  

Three chapter
   아들러의 심리학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거부한다. 즉, 필요를 거부한다. 인정욕구는 상벌교육의 영향이다.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킬 이유가 없다. 우리는 타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인정욕구는 타인의 기대를 자극하게 만들 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을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다 보면 나의 존재를 억누르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과제의 분리 –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이를 분리하는 방법은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아들러는 방임주의를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과제가 누구의 것인지 알게 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도울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선을 다해 돕지만 개입하지는 않는다. 변화는 자신의 몫이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에서 볼 때 부모는 아이에게 조언하지만 개입할 수는 없고, 다만 과정 속에서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필요하다. 아이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도 자신의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필요하고 분명하다.
   인생의 과제로부터 극복하기 위해서 가질 행동의 목표 두 가지는 첫째, 자립할 것, 둘째,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과제의 종류는 넓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일의 과제이다. 이는 일을 매개로 관계하며 이에 얽힌 인간관계를 피하려는 것이다. 둘째, 교우의 관계는 넓은 의미에서 친구관계이다. 비즈니스 관계와는 반대이다. 마지막 사랑의 관계는 가족관계이다. 아들러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상대를 구속하거나 상대의 행복을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다. 

   타인을 싫어하는 감정은 그의 결점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이 변했기 때문이다. 관계를 종결하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결점이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러는 이것은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단지 책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환경에 전가하여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칠 뿐이다.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에 직접적 개입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이것은 인간관계의 단초가 되어 인간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정욕구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 받지 않고 싶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제의 분리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는 삶이다. 오히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186p)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필요하다. 
   아들러의 관계를 절단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과거의 상처를 들쳐낸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러나 그러한 목적이 들기까지 과정이 영향을 누적된 것이 아닌가? 누적된 증오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때 나의 변함은 나 자신밖에 없다. 상대는 달라지지 않는다.(달라질 수도 있고) 즉 인간관계에 있어서 관계를 결정을 변경하는 것은 자신이지만 타인을 조종할 수는 없다. 다만 관계의 열쇠의 주체를 누구에게 전도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Four Chapter
   아들러의 심리학은 개인 심리학, 즉 Individual Psychology 여기서 Individual은 분할할 수 없는 뜻으로서 이성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 등 모든 이원론적 가치관을 거부하는 심리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성과 감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즉 나와 감정을 분리시켜 감정 때문에 ‘나’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를 거부한다.(203)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이다. 그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국가, 인류, 학교, 직장 더 나아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 동식물과 무생물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이는 본인 자체도 ‘도달하지 못할 이상’으로 인정했다.(207) 그의 공동체는 사회의 최소 단위로서 ‘나’와 ‘너’의 기준점으로 시작한다. 이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는 것이다.(208) 타인의 인정에 집착하는 삶은 반대로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기중심적 생활양식이다. 즉 타인의 인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 된다.
   우리는 인생의 과제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곧 공동체에 공헌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그의 공동체 개념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인연까지 포함한다.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할 때 우리는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듣고 상식을 따른다. 그러나 이것이 부당하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과제를 분리하면서 공동체의 감각에 이르는 것은 가능한가?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모든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수평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수평관계에서는 어떠한 상벌은 수용되서는 안 된다. 개인은 오히려 문제에 맞설 용기가 없을 뿐, 잃어버린 용기를 찾도록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단순 칭찬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평가가 없다. 아들러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235) 그 가치는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가 될 때 느끼는 것이다.(236) “자신의 주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낄 때”(236) 가능하다. 그렇다면 반면에 공헌하지 않는 존재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존재의 차원에서 존재는 존재하는 자체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 자체는 공헌이 되고 가치가 된다. 
   아들러는 하나의 수직관계가 있다면 아무리 수평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개인은 무지 중에 모든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회사 안에서 수평적인 관계는 가능한가? 그는 여기서 직위의 수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수평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Five Chapter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는 것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다.(259) 먼저 자기수용은 자기긍정과 차이를 지닌다. 후자는 긍정을 위해 주문을 거는 행위라면, 자기수용이란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핵심은 변할 수 없는 것에 초점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것에 용기를 내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수용이다. 이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용기의 부족이다. 
   타자신뢰란 신뢰에 있어서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관계는 신용이라는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것이다.(264) 조건없는 신뢰가 깊은 관계를 형성시킨다. 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평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이다.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268) 인간관계에서 배신은 타인의 과제이다. 이는 감정을 배제하는 행위가 아니다. 고통과 슬픔을 피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요점은 관계설정에 있어서 신뢰 때문에 발생되는 상처를 방관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관계하는 것에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위의 둘의 수용과 신뢰가 있더라도 공동체 감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최종적으로는 타자공헌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의 본질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며 이를 실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감은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타자공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무관하다. 자신의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의 유무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과제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감각, 곧 공헌감 자체만 가지면 만족할 수 있다.
   아들러는 삶에 있어서 어느 한 가지의 돌출된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한 것, 또한 육아, 친구와의 교류, 취미도 포함된다. 이는 인생의 과제를 배제한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인정욕구를 통한 공헌감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한다. 인정욕구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공동체 감각을 지향할 때 인정욕구는 사라진다.
   모든 사람에게는 보편적으로 우월성 추구 본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평범한 상태에서 탈피해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은 ‘안이한 우월성 추구’가 된다. 이는 불건전한 태도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태도는 바로 평범해질 용기이다. 이는 무능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 뿐이다. 그런 인생에는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면죄부를 주고 미래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을 방지하게 한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 진지하고 빈틈없는 성실함을 요구할 뿐이다.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고 본다.(315)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16) 인생의 의미는 자신만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유를 선택하고 행복을 추구할 때 우리는 이에 ‘길잡이 별’을 의지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타자공헌이다. 어떤 경쟁도 목적지도 필요없고 에네르게이아적 인생(305)을 살다보면, 즉 삶 자체를 살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된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