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의 이성에서의 도피 요약
1. 자연과 은총
(1)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과 은총에 대하여 처음으로 논의한 사람이다. 그의 시대 이전까지는 자연은 세계의 한 부분으로 강조점이 약했다면 은총은 거룩한 것으로써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움을 갖고 상징으로 비유되었다. 그러나 아퀴나스 때에 자연과 은총의 구별은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요소를 비로소 탄생시키게 된다.
(2) 아퀴나스는 은총과 자연의 통일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연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서 자연과 은총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3) 아퀴나스는 불완전한 타락을 주장한다. 인간의 의지는 타락했으나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영역에서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 되었다. 즉 자연의 영역에서 자연 신학은 성경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추구될 수 있었고, 인본주의적 요소들이-철학, 미술, 음악 등- 대거 등장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자연 신학과 성경의 상호 관계성을 이야기했지만 그의 주장은 인본주의적 요소에 기울여져 있다.)
(4)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의 사상은 곧 자연이 자율을 얻어 은총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가 바로 북유럽의 반 아이크, 마사치오, 필리포 립파, 푸케 등의 미술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5) 아퀴나스의 사상에 반하여 피렌체의 원로 코지모는 플라톤의 철학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신플라톤주의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신플라톤주의는 자연의 개별자보다 은총의 보편자를 회복하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은총의 차원을 복고하려는 노력은 개신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이상, 이념, 자연의 영혼 등이었다.
(6)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지배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연과 은총을 통합하려는 희망을 가졌고, 그런 의미에서 보편자를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 시도한 까닭에 많은 회화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2. 자연과 은총의 통일
(1)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적 교차를 가리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519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때 그를 프랑스에 데리고 온 사람은 프란시스 1세이다. 칼빈은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1세에게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였다.
(2) 아퀴나스와 종교개혁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불완전한 타락을 전제하지만 종교개혁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였다. 또한 아퀴나스는 자연의 자율적인 부분을 인정했지만, 종교개혁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자율성 또한 성경에만 인정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은총과 자연의 통일성을 강조했지만 자연은 “계시된 규범 안에서 가능한 참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32) 구원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인본주의적인 구원의 자격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말하였다.
(3) 종교개혁의 인간은 전적 타락으로 인한 결함을 지니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영속하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동물의 본능적이고,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이다.
(4) 종교개혁은 플라톤주의와 다르다. 플라톤의 견해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 주장하며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욕망으로 이해하였다. 반면에 종교개혁은 육체와 영혼, 둘 다를 중시하며 하나님의 전인에 관한 사랑과 구속을 전제한다.
3. 절망선
(1) 종교개혁 이후 객관적 실재와 원인과 결과에 존재를 탐구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들어서게 된다. 초기의 과학자들은 기독교의 견해와 같이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우주의 형성을 탐구했다. 즉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근대 과학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열린 체계, 즉 하나님의 인과율 체계 속에서 인식했다.
(2) 그러나 근대가 태동하면서 칸트와 루소는 아퀴나스의 자율 사상을 받아드려 이성과 합리주의의 진보를 이룬다. 이 시기에 은총이란 개념은 소멸되고 ‘자연과 은총’이 아니라 ‘자연과 자유’가 되었다.
(3) 변천 과정에서 자연은 전적으로 자율적이 되어 결정론이 대두되고, 절대적 자유를 신봉하는 보헤미안주의가 발생되었다. 이는 제한이 없는 합리적 세계에 적합하지 않은 자유가 발생하게 되었다.
(4) 서양 철학의 세 가지 중요한 공통 원리는 1. 합리주의적, 2. 합리적인 것을 신봉하는 것(반정립 사상과 연관지어 사고함) 3. 하나의 통일된 지식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적 인본주의 사상이다.
(5) 근대의 이성과 합리주의의 강조는 이전의 열린 체계에서 닫힌 체계로 접어들어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믿지 않는 지배적인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도 자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기계론적 사고방식 안에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낳게 된다. 여기서도는 도덕도 사회의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6) 철학의 인본주의적 사상은 체계가 완성되면 반정립 방식을 통해서 다른 체계를 세우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헤겔은 그들의 인식과 방법의 변혁을 일으켜 정립과 반정립의 사고를 거친 종합을 이루는 해답을 이루도록 하였다. 이러한 헤겔의 정반합의 원리는 합리성을 희생시키고 합리주의를 고수하도록 만들었고, 상대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7) 계몽된 인간의 의식과 합리주의와 상대주의의 세속의 물결은 현대인들에게 통일된 지식의 영역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세속의 물결은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대중에게 무분별하게 파급되었다.
4. 도약
(1) 역사의 실존주의에 이르러서 드디어 은총은 비합리적 도약으로 한 비이성적인 신앙에 이르러 낙관론을 허용하고, 자연의 하층부는 이성과 합리성을 따라 모든 것을 통계와 수치의 수학적 방식과 기계적인 인간을 만들어냈다. 인간다운 인간은 죽게 된 것이다.
(2)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르를 중심으로 세속적 실존주의와 종교적 실존주의로 나뉘었다. 세속적 실존주의에는 대표적으로 사르트르, 그는 인간의 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실존적 체험을, 우주를 합리적으로 볼 때 부조리한 것으로 보아, 모든 것은 인간 의지의 발로이기 때문에 절망을 벗어날 수 없다. 둘째로 야스퍼스, 그는 인간은 격정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지각한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이 체험에 희망은 결국 절망을 야기한다. 셋째로 하이데거, 그는 불안을 설명한다.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으로 보았고, 인간의 만사가 이 불안과 결합임을 강조한다.
(3) 종교적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르를 중심으로 칼 바르트로 연장된다. 이들은 하층부에서 상층부로의 인간의 도약을 말한다. 바르트는 고등 비평이론을 지지하였고 성경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지만 역사적 진리와는 구별하여 성령의 역사로 보았다. 따라서 성경은 권위를 가지며 신앙은 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층부로 도약이 가능하며 이는 문제를 가지지 않는다.
(4) 신신학에서 접어들면서 부활 혹은 십자가의 표현은 하층부에서는 정의될 수 없고, 상층부에서는 오직 내포적인 단어로서 언제나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영역에서만 사용한다. 이는 이성으로 검증할 수 없는 상하층을 분리시키는 절망적 행위이다.
(5) 현대의 사고는 올더스 헉슬리에 따르면 ‘제일의 체험’을 얻기 위해서 약물 사용을 제안한다. 동양의 신비 종교에서는 종교적 체험을 얻고자 마약을 수 세기 동안 사용했고, 줄리안 헉슬리에 따르면 ‘낙관주의적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내일’이라는 희망을 제안한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하층부가 상층부를 향한 일종의 도약이다.
5. 상층부로 도약하는 예술
(1) 자연은 기계의 포로가 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고, 여기서 누리는 인간의 자유는 규제할 하나님이 없고 보편자가 없는 무제한의 절대적 자유이다. 그러므로 개인화의 성장은 전적인 자유를 가지고 자신을 표현하게 만들었다.
(2) 후기 하이데거는 70세 이후 자신의 실존주의를 받아드리지 못함으로써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인의 권유로 끝맺음을 한다. 이는 시의 내용이 아닌 시의 존재를 상층부로 옮겨 희망적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3) 예술의 영역 앙드레 말로는 “침묵의 소리”에서 현대인의 절대 기준에 대한 희망을 상실함으로 나타난 변화를 드러냈다. 피카소에 의해서는 보편자를 추상이라는 방법을 써서 창조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미술은 의사소통의 상실을 야기시켰고, 보편자를 성취하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4) 음악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은 그의 작품 카디쉬 교향곡에서 음악이 상층부로 인도하는 희망이라고 암시하였다.
(5) 1980년대에는 외설 문학들이 상층부로의 도약하는 시점이었다. 원래 외설 문학들은 철학적 진술을 담고 있었는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테리 서던에 의하면 인간의 심리학적 지향이 윤리를 무너뜨리고, 서던에 의하면 황금시대를 위한 윤리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에서 외설 문학이 사용되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부재는 인간의 공허를 촉진시키고 수동적인 피학대적 인간을 만들었다.
6. 신비주의
(1) 푸코에 의하면 계몽주의의 계승자들은 합리적 근거 하에 하나의 통일된 해답을 제시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본다. 그는 이성의 초월적 능력을 간과하였다. 현대의 탈(post)라는 표현은 19-20세기의 사상을 배척하고 도외시하면서도 이를 능가할 만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푸코의 사상은 알더스 헉슬리와 유사하며, 결론에서는 루소를 따르고 있다. 그도 약물 사용을 통한 도피를 긍정하며 이러한 푸코의 사상은 일부 히피의 사상을 내포한다.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과 인간성의 회복 자연에의 귀의를 표명한다.
(2)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합리성을 무시하는 신비주의, 범주 없는 신비주의를 말한다. 이 원리는 급진주의 신학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들의 하층부 범주 안에는 하나님과 인간은 죽었고, 상층부의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존재할 뿐, 인격적 혹은 이에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없다. 단지 철학적 타자로서 운운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신학은 이제 불가지론이나 무신론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
(3)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예수를 정의되지 않은 하나의 상징으로, 종교적인 표상을 가진 인본주의로 표현한다. 그들은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단순히 상층부의 예수 혹은 체험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급진주의 신학과 무슨 차이를 둘 수 있는가? 성경이 검증 가능한 것으로 논의되지 못하면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라는 내용 없는 표상을 경계하고 그 표상과 싸워야 한다.
7. 이성과 신앙
(1) 쉐퍼는 신앙과 이성을 대치시킴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를 네 가지로 본다. 첫째, 윤리적 문제이다. 절대적 윤리를 가질 수 없으며, 단지 상대적인 윤리만을 까질 따름이다. 둘째, 법이 존재 근거를 잃는 것이다. 당시 종교개혁의 법 체계는 인간 삶의 일상생활을 지배했지만 현대 기독교 신학은 이를 버렸다. 셋째, 악의 문제를 폐기하는 것이다. 신앙의 눈으로 악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신은 악마다. 넷째, 전도할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2) 신앙과 이성의 대치가 파생한 여러 문제는 지속적인 분단의 갈등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기독교는 삶의 문제 전체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준다.”(108) 반면에 이를 무시하고 계시와 성경을 분리시키고, 신앙과 이성을 대치시키면 비극적 종말을 면할 수 없다. 하층부의 모든 자율적인 것은 쉐퍼에 의하면 무엇이든지 다 잘못이다.
(3) 성경은 인본주의 사상과 체계 속에서 여전히 백문일답이 된다. 만물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이다. 그의 창조는 신의 본질의 연장이라고 보는 범신론적 견해를 부인하고, 동시에 인간의 창조에서도 시간과 우연의 비인격적인 산물이라는 견해도 거부한다. 성경의 대답은 유일무이하다.
(4) 인간은 보편자에게 도달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한다면 보편자를 마련할 길은 사리진다. 사르트르가 말한 만사의 부조리에 이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가능하다. 쉐퍼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것은 아니다. 부패하긴 하였어도 역시 인간이다. 그 증거는 바로 사랑을 하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5) 성경은 그 자체가 인간의 언어를 빌린 절대적인 진리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예로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언어로 표현된 명제적 말씀이 있다.(신5:23-24) 다메섹 도상의 바울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경우도 그렇다. 기독교의 교리는 하나의 체계라고 해서 스콜라 철학적인 추상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시작은 만물의 창조자인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모호한 체험에 대한 이야기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6) 진리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개념으로 나뉜다. 그리스인은 균형 잡힌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합리적 진리라면, 유대인은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존주의적 측면을 갖는다. 그러나 유대적이며 성경적인 진리관은 반정립을 이용한 이성의 기능과 합리성에 대한 욕망을 긍정하는 측면에서 그리스인의 사상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7) 효과적인 복음전달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불변하는 사실들이 있다는 점이다. 불변의 사실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미혹을 거부하고 오히려 급속히 변화는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고, 현재 사상의 조류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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