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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폴봉의 종교학 뽀개기 ③] - 영원 회귀의 신화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2003)

- Prologue.

   

     폴봉의 종교학 뽀개기 세 번째 책입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권 정도씩 종교학 분야 책을 서평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종교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 정도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 얼른 접는 게 맞겠죠..ㅎㅎ 아무튼 바쁜 학기 중에도 최선을 다해 향후 전공 공부를 지속해야겠습니다. 요즘 신화학 관련한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이 책은 특별히 중요할 것 같아서 약간 자세히 정리해보았습니다. 본 서평을 통해 엘리아데와 신화의 세계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나마 맛볼 수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책입니다! 이번 년도 전까지 최소 7회 가즈아~

 

. 요약

 

     본서는 고대인과 현대인이 신화, 제의, 의례, 역사 등을 각각 어떤 방식으로 다르게 바라보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고대인은 원형을 중시한다는 특징을 가지며, 현대인은 새로운 사건을 추구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저자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만나는 지점을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Ⅱ. 주요 내용

 

     본 책은 고대 존재론의 몇 가지 양상들, 더 정확히는 전근대적인 사회 속 인간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존재와 실재의 관념을 검토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고대의 상징이나 신화, 제의들의 심오한 의미를 오늘날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정립된 철학적 용어들존재’, ‘비존재’, ‘실재적’, ‘비실재적은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나, 그러한 사태는 분명 존재하였다. 신화와 상징 등을 통하여 그와 같은 사태들이 일관성 있게 드러날 뿐이다. 인간이 어떠한 사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은 신성이 현현하는 성스러운 존재로 변모한다.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인간의 존재, 행위는 초지상적인 원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원형을 토대로 세계를 문명화시킨다. 고대인의 세계관 내에서 인간의 창조는 세계의 중심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심이란 성스러움과 절대적 실재가 두드러져 나타나는 영역이다. 엘리아데는 중심에 이르는 행위가 마치 성별 혹은 통과제의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덧없고 세속적인 삶이 끝나고 새롭고 실재적이며 영속적인 삶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따라서 중심은 속의 공간과는 질적으로 구별된 성스러운 공간이 된다.

 

 

 

 

     제의적인 결합은 오래전 원시 시대에 원초적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발견한다. 특정한 제의는 그에 걸맞는 신화로부터 만들어지는데, 때로는 제의보다 신화가 나중에 생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신화의 표현이 잠시 늦어지는 것일 뿐, 그와 관련한 내용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인간의 예술 활동은 신적인 행위 모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것은 고대 미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고대 인간의 원형적 행위가 반복될수록 세속적인 시간은 폐기되며 신화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신화의 모델로는 역사적인 인물이 주로 선정된다. 죽은 사람을 조상이라는 원형적 범주 안에 통합시킬 때에는 역사적인 개별성이 사라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고대인은 ‘개인적인’ 기억에는 아무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아데는 고대 인류가 새로운 것과 비가역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였다고 본다.

 

     신화의 사건은 곧 현재의 사건이 된다. 따라서 세계의 창조는 해마다 되풀이된다. 원형적 행위는 반복되어 삶과 세계를 갱신시킨다. 이와 같은 신화의 구조는 창조와 동일하게 종말 역시 원초적 충만함의 재현을 나타낸다. 우리는 다양한 의례가 드러내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제의와 의례는 신성한 원형을 모방한다. 또한, 성소 혹은 희생 제단의 건축은 창조의 반복적 행위로 지칭된다. 신화적인 순간과 현재의 순간은 세속적인 시간 내에서 끊임없이 갱신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의 온갖 제의와 태도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시간의 가치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인들은 삶을 사건이 아닌 범주로 분류하였으며, 여기에서 시간은 크게 고려되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현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영권회귀’를 보여준다. 우주적, 생물학적, 역사적, 인간적 차원 등 모든 차원에서 이 원형적인 행위는 반복되는데, 영원회귀는 시간과 생성에 오염되지 않고 신화를 재현한다. 그럼으로써 세계는 최초의 순간에 다시금 머물게 된다.

 

     고대인에게는 우연이란 없다. 그들의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악마적이며 주술적인 힘에 의해 생겨난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쫓기 위해 청원의 의식을 거행하며, 그것조차 실패하였을 시에는 지고의 존재를 찾는다. 고통의 원인이 밝혀지게 되면 이제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고통 또한 하나의 체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일신론적 계시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른데, 시간과 역사 속에서 계시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메시아적 관념들을 엘리아데는 종교적 엘리트 집단의 독점적 창조물이라고 평가한다. 그들은 역사가 언젠가 결정적으로 끝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견뎌낸다. 그리스도교인의 역사는 미래 속에서 폐기되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인간이 영적 자유의 실현을 통해 시작과 끝이 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인도의 주요한 두 가지 전통인 불교와 자이나교의 핵심 내용은 순환적 시간과 범인도적 교의를 수용한다. 이러한 순환적인 시간에 대하여 인도인들은 ‘역사에 대한 거부’를 보인다.

 

 

 

 

     영원한 반복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인 사건들은 범주들로 바뀌며, 고대적인 정신의 지평 안에 지닌 존재론적 지위를 되찾는다. 그리스의 영원회귀 이론은 원형적인 행위의 반복이라는 고대 신화의 최종적인 형태라고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대화재에 의하여 종말을 맞이하는 대재앙의 신화는 역사를 종결시킴으로써 인간에게 영원과 지복을 전달해준다. 역사의 주기적인 재생에는 낡은 교의적 흔적들이 항상 잔존한다. 따라서 최종적인 종말이 실현되기 전까지 역사는 무수히 폐기되거나 갱신될 수 있다. 역사가 보이는 그 어떤 재앙도 자의적이지 않고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재앙은 우주의 리듬, 조물주, 신의 의지로부터 파생되었다. 로마의 신화를 통해 우리는 군주나 사제가 우주 혹은 세계를 영원토록 재창조함으로써 연례적으로 재생시킴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며, 전쟁이나 파괴 그리고 고통 등은 특정한 시대로부터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전조가 아니라 이행 그 자체가 된다. 이처럼 역사는 갱신되며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

 

전통적 문명 속의 인간은 역사적인 사건에 그 자체로서의 내재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을 자기 존재 양태의 특징적인 한 범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역사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반복과 시간의 갱신을 통해 역사를 주기적으로 폐기함을 통해, 또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에 초역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이다. 후자와 같이 역사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은 인류에게 역사 그 자체로서 내재적인 가치를 지니게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역사로부터 파생된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다.이와 같은 관점 덕분에 많은 사람이 상대주의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시각으로 인한 영적 고갈 상태에 빠지지 않고 역사의 압력을 이겨내기도 하였다.

 

반면, 현대인은 역사적인 사건들에 점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현대인은 원형들과 반복에 대한 고대인들의 전적인 신뢰에서 최초로 자신들이 행한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행위, 자유로운 행위들 앞에서 원시인들이 경험한 경이로움과 숭배의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의식도 함께 갖는다. 전통적인 인간이 볼 때 현대인은 자유로운 존재도, 역사의 창조자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엘리아데는 현대인에게 역사가 반복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고대인은 역사의 폭압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화와 제의, 관습 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Ⅲ. 본서에 대한 필자의 비평

 

     엘리아데는 고대 세계는 ‘세속적인 활동’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1] 고대에서 행해진 모든 행위가 각각 나름대로 신화적 원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신화적인 의미가 결여되어야만 ‘세속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고대에는 행동들이 명확한 목표를 추구하거나 의례적인 기능을 하였다고 한다. 본인은 엘리아데가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고대인들은 역사를 왜곡시키면서까지 하나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신화화한다. 그렇다고 하여 고대인들에게 세속적이라는 인식이 없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오히려 고대인들이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구분하여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짐작하여 본다. 마치 삼국시대 이전 삼한에 존재했던 소도(蘇塗)와 같이 말이다. 고대인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성스럽기에 고대인들이 세속 활동을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고대인들이 성속을 나누고 신성함을 특히 강조하였기에 그와 관련된 의례와 신화가 전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엘리아데가 루마니아의 민속학자 콘스탄틴 브라일로이우가 수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다. 하나의 사건이 신화로 변모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일화였는데, 그 점은 상당히 수긍이 갔다. 역사도 역사가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고 변형될 수가 있듯이, 신화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신화의 역사적 진실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신화를 공유하는 집단이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떠한 의례, 가치 등을 중시하는가에 따라서 역사적 행위는 유동적으로 전승되고 결국 신화의 역사는 거짓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화는 거짓인 동시에 진실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통찰은 나에게 신화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풍부하도록 해주었다.

 

     엘리아데는 히브리인들과 야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역사를 의미를 설명한다. 히브리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때 그에 합응하는 징벌적 사건을 조우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엘리아데는 신의(神意)라는 개념을 꺼낸다. 신의 의지가 개입된다는 점을 전제로 일어나는 모든 역사적 사건은 역사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엘리아데는 일신교가 신성과 인성에 근거하는 계시를 전해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주로 예시로 참조하여 논지를 이어간다. 이와 같은 신앙적인 관점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인 사건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본서의 마지막에도 재차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신학도로서 엘리아데가 이러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며, 약간의 전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신 때문일까? 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모든 인간은─그가 특정한 종교와 신앙이 있든 없든 간에─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무슨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던지 상관 없이 종교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엘리아데의 주장에 접근한다면 그의 논지가 약화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떠한 종교를 변증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조금 느껴졌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나 자신의 느낌일 뿐이다.)

 

 

 

 

Ⅳ. 기억에 남았던 한 문장

 

“자연 속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헤겔

 

     고대인의 신념을 깨고 자유롭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심리가 반영된 문장이다. 전통적 관념에서 ‘사건’이란 금기시되고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사건’은 자율적이며 고정성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된다. 위 문장은 이러한 현대인의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동시에 고대인이 중시했던 가치를 잊지 못하도록 한다. ‘자연’이라는 원형적 양식 또한 역사를 이루는 주축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멋있는 말이다.

 

 

 

 

<주>

 

[1] 미르치아 엘리아데, 심재중 역 영원회귀의 신화(이학사, 2003), p.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