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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마주하고 죽음을 생각한다. 때로는 미루어 짐작하여 죽음을 예견하지만 늘 죽음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뜻밖에 불쑥 찾아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죽음을 멀게만 생각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 일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 볼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막연하게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 심판의 두 가지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것은 영속적이고 정의로운 일로 생각한다. 심판은 영원하고 정의롭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죽음 이후 심판은 영원할까?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친구가 지옥에 있다면 그 심판의 형벌이 영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귀는 구원받을 수 없을까? 말도 안되는 소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이론은 고대의 오리게네스를 통해서 제기되었던 주장이었다. 그는 마귀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이 문제는 제도교회의 신학자들에게서 전체적으로 거부된 이론이였다.

몰트만은 ‘만유의 화해’를 주장한다. 이 이론은 당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교회, 개혁교회로부터 거부당했지만 17세기 초기 경건주의로부터 다시금 제기되었던 주장이었다. 요한 알브레히트 벵겔의 회복론에 의하면 최후심판은 물론 하늘과 지옥에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보편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제자 외팅거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연합될 것이라는 ‘포괄적 종말론’을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여러 현대 신학자에게 영향을 미친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에 의하면 만유의 화해는 ‘희망의 고백’이 되었다. 블룸하르트 운동에 자극을 받은 종교 사회주의자 헤르만 쿠터와 라가츠도 모든 사물의 회복을 기다렸다. 블룸하르트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칼 바르트도 구원의 보편주의에 대한 그의 후기 경향성을 받아들였다.

이 주장은 성서에 대한 논쟁의 첨예한 대립이 있다. 성서적 논증의 고찰은 심판 이후 두 가지 결과와 만유의 화해론에 대한 입장을 아주 견고하게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학적 논리도 가지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 입장은 있으나 그것은 보류하고 다만 죽음 이후에 희망의 하나님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에 관한 보편화되지 않은 다른 입장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상실된 자들을 찾아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상실하셨다. 그는 “우리들의 모든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때에 희망을 준다.” 몰트만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이후 영원할 멸망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이를 완성시켰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며, 그의 재림의 때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사랑은 ‘값싼 은혜’가 아니라 그것은 철저히 은혜이며, 은혜는 언제나 오직 ‘값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