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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원히 살수는 없어?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한 어린 소년의 질문에 울컥해서 써봤다. 어린 소년의 질문이다. “네 가족 오순도순 행복하게 영원히 살 수 없어?” 우리는 이 질문의 대답은 어렴풋이 알지만, 그 의미를 너무 왜곡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껏 영원히 삶을 꿈꾸는 것 이면에 세속적인 의미들이 존속한다고 의심 없이 생각해왔다. 진나라의 황제는 영원한 권력 유지를 위하여 불로초를 찾았고, 현대의 생명공학은 생명의 연장을 위해 봉사한다. 이는 삶에 대한 끝없는 욕심이고 극적인 자아실현이고 생물학적 운명을 거스르는, 내가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지구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리는 이기성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그 자체가 세속적인 죄의 결과 혹은 더욱 본질에 대한 의미로부터 벗어난 사고가 아니었는가 생각이 들었다. 그 소년에게는 생에 대한 의지라든가 권력에 대한 욕심, 균형과 조화를 부수고 운명을 거스르는 차원이 아니라 단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수한 슬픔뿐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이별의 아픔이 서려 있기에 영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세속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의미들도 어쩌면 욕심과 세속적 자아실현이라는 의미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애착했던 대상으로부터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 아닌가? 세속적 가시성은 의지가 아니라 이별을 거부하려는 광기의 왜곡된 드러남 아닌가? 이별은 곧 분리이다. 우리는 분리를 피하기 위하여 결합하고자 한다. 이는 도취가 될 수도 있고 공서적 합일 그리고 성숙한 사랑에서 기인된다. 어떠한 형태의 결합이든 이는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총체적 시도일 뿐이다. 이것이 옳고 그름은 단지 분리에 대한 이별의 순수성의 차이만을 드러낼 뿐이다.

어린 아이의 질문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이 땅에서 영원은 불가능하고 저 하늘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부분적으로 맞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과 맞닿아있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안에 찾아오셨다. 그는 창조와 함께 시간을 지으셨다. 이는 우리의 회상과 기다림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현재를 살아가게 만든다. 이 현재적 삶에 영원히 맞닿을 때 우리는 상대적 영원 속에서 카이로스를 경험하며 때로는 신비적인 황홀경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시간의 충만함을 통해서 상대적 영원은 절대적 영원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허무한 시간은 영원한 시간 혹은 영원한 영원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 땅에서 우리는 회상과 미래에 대한 기다림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들과 연결될 수도 있다. 이는 정신적인 한 측면이 아니라 주 안에서 가능한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합된다. 주 안에서 그들과 모든 인간적인 관계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바로 그 지점에서 말이다.

이별은 영원한 기쁨에서는 극복 가능하다. 분리를 피하기 위한 결합이라면 반드시 분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합되기 위한 분리라면 반드시 결합될 수 있다. 이 땅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새 창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불 실판을 통한 폐기를 주장했던 루터교회, 세계의 변화를 주장했던 개혁교회 신학, 이와 반대로 세계의 신격화를 주장했던 정교회 신학은 몰트만에 의해서 거부되고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는” 이 세계를 전제한 새 창조로서 생태학적인 책임적 종말론을 주장한다. 이는 분리에 대한 극복과 희망을 제시하고 영원한 사귐으로의 초대가 될 것이다.

신적 결합에 대한 갈망은 이별이라는 아픔의 전제 속에 비로소 실현된다. 하나님과 아들의 분리는 그들의 결합과 하나 됨을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강력하게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는 새로운 희망 속에서 더욱 온전한 결합을 이루어낼 것이다. 저미도록 이별한 고통이 없다면 성숙하고 온전한 결합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원한 삶에 긍정적이고 낡은 세상에 동력의 불을 지필 진보를 이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