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목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세속적 실존주의 관점에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렇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불평등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사회가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어디 이유가 그것만일까? 생물학적인 부모의 불평등, 자본에 대한 불평등, 교육에 불평등, 더 나아가면 국제적 불평등 등 가히 말할 수 없는 불평등한 삶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을 탓하지 않는 이유는 희망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 삶에 대한 책임의 심판이 잇따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자 앞에 섰을 때 그분 앞에 자신의 모든 삶이 파노라마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검증될 것이다. 그것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라고 하여도 말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공로 덕택에 죄악은 용서받는다. 오히려 그의 선행은 계수되고 인정받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선행이든 죄악이든 절대자 앞에 심판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그의 정의다.

그분은 자신의 사랑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심판하시기 때문에 불평등을 탓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 초월자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슬퍼할 필요도, 행복을 자랑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래서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해체 혹은 분리 그리고 파괴시킬 수 없다. 부정은 부정을 거듭하여 정의를 실현시킨다. 실현된 정의는 존재를 뛰어넘는다. 모든 존재는 존재자의 정의에 굴복된다. 그것이 그분의 공의다.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현대의 비참한 현실과 유럽 강대국들의 억압과 폭력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낸다. 차마 벅차오르는 복잡한 마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만들게끔 말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는 첫째 문제는 유럽연합의 파렴치한 경제 정책이다. 유럽연합은 개발도상국들을 대상으로 빌려준 누적된 외채를 덤핑 정책을 통해서 외화를 벌어들여 원금과 이자를 갚게 만든다. 그들의 파렴치한 정책은 그들의 최저소득을 보장하지도 미래성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둘째 문제는 토지를 매입하여 농업연료를 생성하는 것이다. 특히 농업연료 세계 1위인 미국은 화석연료를 대체해 농업연료를 생산한다. 미국의 논리는 불합리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연료대체 대책은 매일 지구상의 3만7천명의 기아 또는 굶주림을 만들어낸다. 농업연료는 곡물을 태운다. 태워지는 그 곡물은 수많은 기아를 살릴 수 있는 식량이다.

오늘날 세계 인구 중 10억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로 신음하고 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마다 1명씩 기아로 사망한다. FAO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의 농업 생산량이 정상적이라면 1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제1세계 국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있다. 끝없는 이기적인 욕심이 지구 기후의 파국을 부채질한다.

희망은 어디있는가? 저자는 ‘공공의식’을 주장한다. 기아와 전쟁에 대한 인식과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 등 유엔의 ‘밀리니엄 개발 목표’와 같이 인식과 지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헨티나 출신 여류 시인 메르세데스 소사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우리에게 깊은 통찰과 인식의 변화를 준다.

“나는 신에게 꼭 한 가지만 청한다네 고통 앞에서 내가 무심해지지 않기를 창백한 죽음이 이 땅에서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한 채 텅 비고 고독한 나를 찾게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