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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신앙 이야기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1

신앙은 크게 두 가지, 바울형의 신앙과 디모데형 신앙으로 나뉜다고 한다.

바울형의 신앙을 세상을 살다 하나님과의 극적인 경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디모데형의 신앙은 흔히들 말하는 ‘모태신앙’을 가리킨다.

나는 디모데형의 신앙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었다.
엄마 뱃 속에 있을 때부터 대학교 2학년 군목시험을 볼 때까지는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를 포함한 모든 공 예배에 참석했다.

이렇게 때로는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예배를 중요시하게 된 배경에는
목사님이신 아빠보다 ‘엄마’의 영향이 너무 너무 크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신생아일 때부터 8-9살때까지 엄마는 내가 잠들기 전에 늘 찬송가로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정말 많은 찬양들에 내 이름을 넣어서 불러주셨다.
그 중 아직도 기억나는 수많은 찬양들 중 하나는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라는 찬양이다.

“ ‘오이다’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믿음 뿌리 내리고.. 주의 뜻대로 주의 뜻대로.. 항상 살리라..”



이 기억들이, 그 목소리가, 내게는 너무 따듯하게 남아있다.
나는 그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리고 엄마가 나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이 계셨다.

엄마는 내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토대로,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셨다.
나는 아빠가 교회를 개척하시기 위해 준비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참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충분한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살았기에 그 삶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너무너무 따듯하고 좋았던 기억이 가득했다.

어찌됬든 그 당시 나는
과자나 군것질을 제대로 해본 적이 손에 꼽았고 과자를 사달라고 요청했을 때면 수차례 엄마한테 안된다고 거절당해서,
언젠가는 슈퍼에서 과자를 보이며 엄마한테 ‘엄마 나 이거 사면 안되죠?’ 라고 물어보았다가,
엄마가 다른 아이였으면 한참 떼쓸 나이인데 이렇게 물어본다는 게 마음이 아파서 울었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 그렇게 늘 먹고 싶었던 치킨은 두 달에 한번 정도 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또 감사하게도, 내가 무언가 먹고 싶다고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께서는 교회 집사님들을 통해서 채워주셨다.
그러면서 엄마가 덧붙이는 말이 “하나님이 나를 참 많이 사랑하신다”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음만 먹어도 응답하셨다고.
그렇게 엄마는 늘 모든 것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을 중심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런 자잘한 기억들이 참 많았고,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의 내 삶의 중심은 늘 하나님이셨다.
내가 8살쯤에도 동생과 장난치다 나무 문에 손가락이 찧여서 손톱이 통째로 날라갔을 때,
나는 ‘엄마 엄마’하고 울기보다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울었다.
정말로 내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던 것 같다.
그때는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이었다.
적어도.. 아빠가 교회를 개척하시기 전까지의 내 신앙이 그랬다.


#2

엄마와 아빠는 이전에 사역에 성공했던 경험들을 토대로 자신감있게 개척하셨다.
그런데 목회가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다.
온전해야만 할 교회에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보다는
성도들 간에 온갖 오해와 불신으로 더 얼룩진 듯 했다.
처음 사랑과그 열의는 점차 식어졌고, 교회가 교회로 바로서기가 어려웠다.

막상 교회를 개척했지만 우리 가족끼리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어느새인가부터 내게 있어서 기도도 예배도 그저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동생은 한때는 ‘무신론’에까지 빠졌다고 했다.
심지어 나도 설교시간의 대부분은 졸며 보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결코 내 손에서 내려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닐 뿐이지 그저 신앙 생활을 ‘연명’했던 것 같다.
참! 공부도 열심히 안했었다. ㅎㅎㅎ

그러다가 이렇게 살면 정말 안되겠다 싶어서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하루에 10시간 넘게 집중해서 공부했다.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쾌감이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던 것 같다.

앞에서 이야기 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늘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같은 형제가 되길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무의식 속에서 늘 언젠가는 목회자가 되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사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변치않은 내 꿈은 과학자였기에,
나는 뛰어난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고 싶었고, 한 내 나이 50쯤 되어 목사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일같이 공부하면서 20점 맞던 수학을 90점 초반까지도 끌어올렸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한동대’라는 학교에 마음에 꽂혀서 수시를 지원하게 되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
나는 재수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동대에서 과학자라는 내 꿈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교육을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나이기에 당연히 재수도 ‘독학재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시기가 내게 있어서는 첫번째 광야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많은 것들이 내게 참 어려웠던 것 같다.
사교육도 받을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에 큰 마음먹고 집중해서 공부해야겠다 다짐하고
고등학교 친구들의 연락을 뿌리치고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던 것 같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외로웠고, 어려운 마음에 공부를 점차 손에서 다시 내려놓게 되었다.
한동대? 당연히 갈 수 있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또 다시 재수를 해야하나, 전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신학대’였다.
진지하게 목회를 꿈꾸었던 누군가라면 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홀리하게 그렇게 은혜받고 신학교로 오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내 나이 50살먹고 목사를 할거였으니, 그냥 지금 일찍 신학교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왔다.

여기까지가 신학교로 오기까지의 내 신앙적인 배경이다.
신학교를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가짐으로 신학교를 진학한 사람의 글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여기까지가 내 신앙의 진보의 끝이라면, 당연히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계획하심 아래에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 신앙에는 여타 다른 신앙인들, 그러니까 바울형의 사람들의 특별한 경험과 비교했을 때,
무언가 엄청나게 각별하고 특별한 경험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잔잔하게 순간순간 조금씩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나는 그렇게 신학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는 그저 그런 마음으로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내 신앙은 군목시험을 준비하면서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와 돌아보니 그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아마 나는 재수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군목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절대로 이 나이에 신학교로 오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셨다.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렘 10:23)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신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또 당신이 만난 하나님은 당신에게 어떻게 일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깨닫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또 언젠가 우리가 그 이야기들을 나눌 시간이 오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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