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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신앙 이야기

신학을 결정하기까지

HanRip's potography


신학대학교를 지원하면서 신학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내게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모태신앙으로 자라 고등학교 1학년 시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였다. 누군가는 수련회를 통해서, 혹은 부흥회 등 집단적인 분위기 내에서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이고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흔히 모태신앙으로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고는 했지만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아니었다. 때로는 어머니의 압력에 의해서 혹은 교회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심지어 머리도 안 좋은데 관심까지 없으니 거기다가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이름 외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진정성 있는 신앙이 생기기 이전에는 도대체 교회 선생님들이 이토록 열심을 가지고 헌신하시는지, 선생님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나의 가정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술 중독에 어머니는 장애가 있으셨다. 외동으로 자라 외롭고 가난한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날 더욱 작게 만들었고, 따스한 동정의 손길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시선은 날 위축시켰고, 동정은 가식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오히려 나는 세상을 더욱 등지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교회 목사님과 선생님들은 달랐다. 그들의 시선은 진심이었고, 그들의 동정은 위선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목사님은 나의 학예회 발표와 부모 동반 수업에 찾아와주셨고, 선생님들은 나의 가정에 찾아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주셨다.

나의 중학교 시절 등산 패딩이 유명했다. 다들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걸치고 위풍당당하게 학교와 거리를 활보하였다. 패딩이 점차 보급되던 시기라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유명 브랜드는 아니어도 그보다 낮은 브랜드의 패딩을 입었다. 그러나 나는 브랜드가 없는 패딩 조차도 없었다. 겨울에는 옷을 몇 겹 두텁게 만들어 입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와주셨다.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퓨마 패딩을 선물해주셨다. 친구들은 퓨마가 저가 브랜드라며 놀려댔지만 나는 너무 기뻤다. 기쁘다 못해 자랑스러웠다.

목사님과 선생님들의 이러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한 가정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였다. 그분은 가난하고 비참한 나의 삶에 찾아와주셨고, 나와 나의 가정을 사랑하시고 나를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 꿈도, 비전도, 희망도 없던 나에게 하나님은 희망을 주셨다. 어릴 적에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누구보다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고난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광야의 시간이 하나님을 가장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을 만나니 희망이 생겼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할 이유가 생겼다. 죄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할 명분이 생겼다. 신앙해야 할 동기가 생겼다. 공부 머리가 없어서 특성화고를 진학했고, 흔히 말하는 성적이 부진한 학교에 가장 낮은 성적으로 겨우 입학했다. 그러나 희망이 생기고 이에 따른 명분과 동기가 생기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배치고사에서 거의 꼴등이던 내가 졸업할 때는 1등을 하게 되었고, 남들이 노력할 때 안 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열심히 공부한다. 신학뿐만 아니라 관심 있고 해야 하는 많은 영역을 말이다.

학교에서는 특별히 입시반을 위해서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독서실에서 자율학습의 기회를 주었다. 열심히 공부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복음을 전파했다. 고등학교 시절 10명 가까운 친구들을 전도해서 교회로 데리고 왔다. 학교에서는 점심시간마다 기독교 동아리를 창설해서 매일 말씀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나며 학교가 대거 밀집되어 있는 장소 앞에서 1~2시간씩 매일 전도하였다. 전도가 끝나면 공부하고 저녁 7시부터 성경 공부하고 8시에는 2시간씩 기도하고 끝나면 또 공부했다.

학교 등교를 위해 매일 왕복 1시간 20분씩 걸어다녔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 걸어다녔고, 그 시간에 늘 기도했다. 그때 나의 최고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을까?”의 고민이었다. 당시 나의 삶의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것이 나의 자부심이었고 지금도 나의 자부심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삶을 살았던 나도 대학에 입학하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목회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접어들었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욱 자세하게 이야기하겠다.

신학은 물론 신앙이 뜨거운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위의 말을 한 까닭은 신앙의 뜨거움만으로 올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앙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사람들이 다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면 평신도는 어디 있겠는가? 목사가 되는 일, 신학을 공부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다음 부분에서 더욱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신학대학교에 입학하고 신학의 길을 걷고 싶다면 반드시 유의할 것이 있다. 그전에 반드시 당신의 신앙을 점검하라. 먼저는 복음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간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의 배경은 중요하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배경 자체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배경이든 나쁜 배경이든 상관없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좋은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좋은 신앙의 유산을 이어나가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을 체험하면 될 것이다. 모두 다른 환경이지만 그분은 그분의 방식대로 일하신다. 오히려 약한 것을 통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이 후자에게는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체험에 대한 의견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거기에는 반드시 책임이 잇따른다는 것이다. 좋은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자는 이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고, 반면에 그렇지 못한 자는 신세만 한탄하고 깊은 좌절 가운데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한다. 이들에게도 책임은 동일하게 부여된다. 자신의 삶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끝으로 글을 쓰는 이 시기는 대학원 졸업을 1년 남긴 시점이다.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신학을 결정하기까지 후회보다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는가?” 되돌아본다. 미련은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마치 롯의 아내처럼, 그러나 확고한 결심은 어떠한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대학교 3학년 때 이것을 깨달았다. 후회보다 미련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지속’도 중요하다. 그것도 꾸준하고 성실한 지속 말이다. 시작도 어렵지만 지속은 더욱 어렵다. 꾸준한 건 더 힘들다. 신앙의 시작에서 성실이 사라지면 미련을 낳는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신학을 결정하기까지 세상에 대한 미련을 종지부 찍겠다는 결심이 당신과 함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