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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신앙 이야기

신학을 위한 3가지 조건

HanRip's Potography


학창 시절,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였다. 하나님 체험은 지난 삶에 있어서, 어쩌면 앞으로의 모든 삶을 포함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니겠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경험한 그 시간이 나에게는 삶의 무의미와 공허의 무거운 장벽을 깨뜨리고 삶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된 사건이기 때문에 어쩌면 신학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내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일련의 각오만이 가득했기 때문에, 어쩌면 목회가 무엇인지,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말의 고민을 배제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신학을 고민했던 것이 아니라 신앙을 고민했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신학교에 입학한 후 알게 되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도 다 사역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수많은 이들이 신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 것인지 말이다. 본 장에서는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나누고 싶다. 먼저 필자는 당시 신앙은 누구보다 뜨거웠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목회자로의 부르심은 없었다. 신앙에 대한 고민이었지, 신학에 대한 고민, 사역자에 대한 부르심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번 장은 신학교 입학에 관련된 3가지를 나누고 싶다. 이는 첫째, 확실한 신앙, 둘째, 신학에 대한 이해 셋째,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다.

첫째, 확실한 신앙이 필요성이다. 필자에게 가장 자신 있는 영역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체험과 확신이 있었다. 당시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슬로건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 건물을 쌓기 위해서는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 어떠한 세상의 이론과 신앙의 반대되는 그럴싸한 이론과 경험이 내게 닥쳐오더라도 하나님 체험이 내게 확실하다면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굳건해진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체험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 땅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들어갈 수 있었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끊임없는 사랑에 대한 체험이 없었더라면 순교까지 결심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사실 신앙의 확실성은 사역자를 준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전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역자로서 더욱 유념해야 할 것은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제의 은혜는 어제로, 오늘은 오늘의 은혜의 만나를 체험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의 신앙은 더욱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단단해진다.

둘째, 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성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은 신앙과 신학을 동일시하는 문제이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이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른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신앙이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목사보다 신앙 좋은 평신도도 존재한다. 전도사보다 신앙 좋은 교회학교 교사도 존재한다. 신앙과 신학의 혼동은 오히려 사역에 대한 비조화를 조장한다. 필자의 생각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체험이다. 즉 신앙이란 하나님을 나의 모든 삶의 순간에서 경험하고 인격적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신학이란 무엇인가?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 신앙을 학문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신학에는 종류가 많다. 이해의 범위가 포괄적이다. 여기서는 신앙도 다 같은 신앙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이들이 신학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있다. 신학은 뜨거운 가슴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기서 오해와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학부 3학년에 좌절을 경험하고 사역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학문으로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냐”고 따질 수도 있다.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하나님은 학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이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늘 아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하시기도 하였다. 우리의 이성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분적으로 회복하였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성경적으로 때로는 체계적으로 말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신학은 결코 독단적인 것이 아니다. 나의 신학의 전제조건이기도 한 “신학은 신앙하기 위함이다.” 신앙과 분리된 신학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것 밖에 존재할 수도 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낄 수도 있지만, 신앙만으로 신학을 전공하려면 들어오기 전에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신학은 늘 신앙을 보조한다. 신앙 없는 신학은 위험하다. 잘 믿기 위해 괴리를 넘어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신학교에 입학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셋째, 부르심에 대한 확실성이다. 위에서 신학에 대한 전제조건들을 나열했다. 신앙에 대한 이해와 신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도 부르심에 확실함이 없다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찬성이지만 사역자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훌륭하고 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어도 그분의 부르심이 없다면 가서도, 갈 수도 없는 길이다. 필자는 신앙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신학교에 입학해서 이해는 안 되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경험하고 학부 3학년 신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동시에 든 생각은 신학교 입학 당시 내게 “주님이 부르셨냐”는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서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주님은 부르신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3학년 때 깨우쳤다. 동시에 든 생각은 목회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했다.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했지만 분명했다.

필자는 1년간 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는 약 1년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먼저는 동기지만 나보다 10살 많은 동기 선배와 교제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두려움이 사명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더럽고 연약한 나도..?”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경외였다. 이 경외심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자는 이 사실을 가지고 외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다. 그 집회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의 모양과 형편에 상관없이 나를 쓰시겠다”는 강력한 성령의 감동을 주셨다. 당시 필자는 겸손을 가장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 거룩한 삶을 위해 발버둥 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 실패가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사용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게 필요하다. 놀라운 사실은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 속에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얻는 사람도 대다수다. 반면에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 속에 목회를 포기하는 사람도 대다수다. 여기서 위의 두 가지 조건은 순위가 뒤바뀐다. 그의 부르심이 있다면 신앙이 부족해도, 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도 목회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과 신학의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역에 대한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신앙과 신학이 훌륭해도 그분의 부르심이 없다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의 부르심이 있다면 이것들은 서서히 혹은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그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확실함과 순종이 있다면 그 걸음을 축복한다. 어둠 골짜기를 걸어갈 때 부르심에 확실함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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