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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란 인류를 지역과 신체적 특성에 따라 구분한 종류이다. 인간이 모이면 인류가 형성되고, 형성된 인류의 특성에 따라 종의 형태가 구분된다. 그렇다면 종의 형태 구분은 언제부터인가? 도대체 그러한 구분에서 차별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최근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논란으로 인하여 문제가 확산되면서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이것은 일명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비무장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남성이 경찰의 무릎에 짓눌려 사망한 사건이다. 조지 플로이드는 무릎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하였지만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로 이어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강력한 시위까지 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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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러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과잉 행동들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회적이고 도덕적 결여 및 문제를 낳았다. 인종차별주의는 무엇인가? 인종차별주의란 “자신의 인종 집단을 종족 중심적으로 자랑하는 것, 자기 집단의 특징을 선호하는 것, 다른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뜻한다. 이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한 인종의 특징을 인간의 본성과 동일시하는 정신적인 기재와 다른 종족에 속한 사람을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하여 지배하려는 지배의 이념적인 기재이다. 이들의 타 종족에 대한 지배의 정당화와 합리화의 태도는 상당히 위험하며 이것이 경제, 사회, 정치체제와 결합할 때, 특히 위험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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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러한 지배 욕구 자체는 사실상 산업 사회 이후 계몽된 인간 이성의 끝없는 탐욕과 권력욕에 의한 오용된 의지이다. 수직적이고 계급적이며 비인격적인 지배 체제는 어느덧 인간 인권을 상대적인 가치로서, 때로는 그것에 상대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서 대우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인격을 고귀하고 숭고한 것으로 인식했고, 그러한 인격은 그 자체로서 존중받고 목적이 된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가 어느 순간 자본주의라는 유물론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것에 의해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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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의 가속화된 자본주의 논리 속에 인간 사회는 획일화된 정의와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인간 사회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았고, 인간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보았다. 개인은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에 의하여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객체’와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권 의식의 상향과 고착화된 차별의식으로부터 탈피하는 인간 본질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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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에 의하면 인권은 “소유물이나 이상(理想)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되고, 인류가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법적, 정치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인권에 대한 권리와 의무의 강조가 확장될 수 있도록 인권 실현을 위해 토론하고 저항하며 투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종의 차별에 관하여서는 “인간의 본질을 고찰하고 인종주의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포기하며, 사회, 경제, 정치의 힘을 새롭게 재분배”해야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종차별주의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