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필연적인 것을 우리가 뽑자면 그것은 바로 관계일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하려는 본성적인 열망을 지닌 듯 싶다. 아주 기본적인 관계하려는 열망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존재하는 무엇과 결합시키는 장치가 된다. 그리하여 본 글은 관계에 대한 19세기 마르틴 부버의 관계에 대한 의미를 소개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확인해보려고 한다.
마르틴 부버는 1878년 2월 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 부모님을 여의고 상당한 재력가이신 할아버지 밑에서 성경과 히브리어를 배우고 1904년부터 1912년까지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은둔생활을 하였고, 그 하시디즘(Hasidism) 연구를 통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철학적 고찰인『나와 너』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의 중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의 관계적 실존이다. 즉 인간은 관계에 의해서만 실존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부버는 모든 존재는 ‘관계’로 이해하였고, 그에 따르면 “사람은 너를 통하여 하나의 ‘나’가 된다.”(나와 너 26) 인간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점진적으로 자신을 발전시켜나간다. 부버에 따르면 하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라는 주체가 너 혹은 그것과 관계될 때 비로소 ‘나’가 될 수 있다. 즉 ‘나-너’의 ‘나’ 이거나 ‘나-그것’의 ‘나’둘 중에 하나이다. ‘나’는 ‘너’로 인하여 비로소 ‘나’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은 너를 향하여 나를 건네는 나의 ‘전존재’를 건 행위, 즉 본질적 행위이다.
‘나-너’의 관계가 생겨나는 영역은 세 가지이다. 첫째, 자연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 둘째, 사람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 셋째, 정신적 존재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이다.
첫째, 자연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은 대상으로서의 관계(그것)이다. ‘나’는 자연에게 말을 걸더라도 응답을 받을 수는 없는 언어의 장벽을 마주한다. 그것은 무인격적이며 혹은 비인격적으로 취급된다. ‘나’는 ‘그것’의 종속적인 정복자이다. 그렇기에 이 관계는 주종의 관계로서 이해되고 수단으로서만 이해된다.
둘째, 사람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은 ‘너’를 부를 수 있으며 언어의 공통성으로 인하여 ‘너’를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너’를 통해서 나의 마음, 언어, 환경, 자신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라고 부른다.
셋째, 정신적 존재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은 ‘너’를 부를 수 있다는 것조차 지각할 수 없지만 누군가 ‘너’라고 부르고 있음을 느끼고 마침내 이에 응답하는 관계이다. “이는 입으로는 ‘너’라고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의 존재를 기울여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관계에 대해서는 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대한 특성을 좀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버가 말하는 너와 그것의 특징은 간단하다. ‘너’는 인격을 가리키고, ‘그것’은 대상을 의미한다. 세계에 관한 이 둘의 관점에서 인격으로서 ‘너’는 세계를 ‘너’로 보는 것이며, 반대로 대상으로서 ‘그것’은 세계를 ‘그것’으로 보는 것이다. 인격으로서 ‘너’는 세계를 인격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관계를 맺는 입장이고, 대상으로서 ‘그것’은 세계를 대상과 수단으로서 이해하여 정복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버에 따르면 ‘나-너’와 ‘나-그것’의 차이는 대상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인격적이고 정서적인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 다만 수단으로서의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관계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생각은 나와 너로서 받아들여지고 행동되어질 수 있도록 관계에 대한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