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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 단상

사역준비하는 이들에게 (부제: 사역의 사선에 내던져진 이들을 위한 글)

 

신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사역을 고민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의문이 들게 된다. 언제 나가야하며, 어디로 나가야하는지부터 모든 것이 의문이 들게 되는 것이 바로 사역인 것 같다. 필자가 사역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여러분 컨택이 왔을 때 주변의 조언 중

가장 현실적인 조언은 두가지 정도를 소개해보려한다.

 첫번째 사역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였다.

 지난 나의 글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지방 대도시 출신이 나는 꽤 규모 있는 지방교회들에서도, 작은 파트전도사 하나 구하지 못하여서 고민인 목사님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기에 학부 반별모임에서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했다. 그 때마다 대답은 ‘부르신 곳이면 어디든 가야지요.’라는 추상적인 답이 돌아 왔다. 부르심은 참으로 여러 의미를 가진다. 우선적으로 강권적으로 나를 그자리로 이끄신 절대자의 순종을 이야기도하고, 구약성경 속 이사야 처럼 자신을 보내달라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불순종의 결과로 종종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적으로, 여러분은 교회를 생물이라고 여기는가? 나는 그리 생각한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그렇기에, 외적인 것 뿐만아니라 내적인 요소도 나타난다. 교회는 성향이 있고, 성격이 있다. 교회도 ‘관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와 내가 맞을수도 있고, 절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수도 있다.

 교회로 사역을 나간다는 것은 교회라는 생명체와 나라는 생명체의 관계속에서 병들어 갈수도 있고, 건강해질수 있다. 결국 사역하고자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면 병들어가는 나 혹은 교회를 보게 될것이다. 부름 받은 나와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두번째 기억에 남는 조언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너에게 충분히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신학대학교 1학년생이라고 해서 무언가 다르지 않다. 다만 교회내에서 전도사님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나이 또래의 학생들보다 성숙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가장 큰 오해이다. 내가 아직 성숙치 않은 자가 사람을 대하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육체적 질병을 다루는 의학을 예로 들어보자, 의대에 간다고 하면 종종 ‘오, 의사선생님’으로 불려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대생에게 나의 몸에 대한 치료를 맡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인가? 그만큼 생명을 대하는 것이고, 아직 미성숙하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사역은 종종 영혼을 다루는 일이라고 한다. 영혼구원이라는 말을 구호처럼 외친다. 교회에서 아니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일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도 여러분은 잘 알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역을 지망하는 나는 정말 그 생명을 공동체로 받아들이며, 얼마만큼 이해하는가. 한가지만 아는 사람이 신념이 생기면, 그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것이 새내기 신학생이라면, 그만큼의 위험성을 가진것도 신학생들 일 것이다. 대다수의 신학생들이 20대 초반임을 염두해두고 이야기한다.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영적인눈으로 세상을 보아왔는가. 교육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파커J. 파머는 현실의 교육에서 이성과감정에 치우친 교육을 한쪽 눈을 가린 교육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한쪽의 눈이 바로 영적인 눈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역지의 영혼들을 사랑하는가. 나의 사랑이 너무나 감정 혹은 이성에 치우친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영적인 바라봄은 어느 날 갑자기 부어지지 않는다. 오랜시간 빚어져야한다. 바울은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3년이었다. 그렇게 하고도 그는 하나님의 가로막힘을 경험한다. 사도행전에서 말이다. 그렇기에 신학교의 교육이 필요한 것이고, 도제교육이 되어지는 것이다. 영혼을 대한 다는 것은 자격증처럼 취득하는 그 어떤것과 다르다. 임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까지 보면 내가 사역을 막는 글을 쓰는 것 처럼 보여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역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 보다 먼저, 지원자 혹은 돕는 손길로 시작하길 권하고 싶은 것이다. 경제적인 활동으로서 사역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 점을 제외하고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의 세상을 직시할 필요가 목회지망생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는 굉장히 일률적인 사역의 현장을 보고 그 속에서 자라왔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다양화의 시대속에서 복음은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전해져야 한다는것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역의 다양성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는가. 결국 다양한 공동체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떄문에 앞서 나는 서포터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몇가지 예시를 들고 글을 마무리하려한다.

 크게는 선교단체, 기독교 사회적 기업, 해외 교회들 등이다.

선교단체들도 각자의 성격이 존재한다. 사회적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들도 존재하고, 전통적인 선교단체들 그리고 특정 대상(주로 대학생, 직업)들로 구성된 단체들이 많다. 훈련의 방식도 차이가 크며, 전달하는 복음의 메세지도 매우 다르다. 현장 중심에서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기독교 사회적 기업들은 그 기업의 정체성에 기독성을 품은 집단들이 존재한다. 그런 기업의 인턴 혹은 기업에서 제공하는 대외활동에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 한국사회에 매우 밀접한 경제활동의 선봉장은 기업체들일 것이다. 이런 경제활동은 교인들의 삶과 매우 밀접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사역자들에게도 매우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해외 한인교회 사역을 예시로 들고 싶다. 이주민이 증가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 우리는 앞으로의 시대를 준비하려면 앞서 이야기한 다양성의 현장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해외에 나가서 살고 있으며, 시간과 물질을 보내고 있다. 사역을 준비함에 있어서, 삶으로 부딪혔을때 인간의 인식은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이 온다. 그 최전선이 아마 이민 사회아닐까 생각한다.

 

사역을 준비하는 여러분, 이미 와 아직 사이에 우리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늦지도 않았고, 아직이라는 단어때문에 조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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