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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 단상

열정적인 신학생(3-5)

 


   학부 3학년 전도사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하고 싶어서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하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어디서부터 나왔던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사역에 대한 안일한 마음과 그 심오한 세계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 낸 근거 없는 빈약한 자신감이었다. 영적으로 조금 뜨거워서 그랬을까? 상대적으로 가장 뜨겁던 시기라서 결정했던 것 같다. 다른 영역들에 비해서 영적인 영역이 나름 자신 있었을 뿐이지 사실은 그마저도 부족한 점 투성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영역들은 어땠을까? 지성적으로,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는 영양실조의 상태였다. 올곧은 나무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붙어있는 느낌이었다. 


   이는 곧 사역 과정에서 열정은 있는데 사역자의 기본적인 자질에 여러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모든 면에서 준비 안 된 견습생의 비애였을까? 사역의 현장은 사역을 하기 전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자책과 상실의 여러 시간을 마주했다. 이는 곧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근간을 흔들기도 하였다. 


   반면에 나 자신의 실망에서 늪에서 곧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런 유한한 인간의 한계는 이윽고 무한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사역의 주체가 나로부터 하나님을 변할 수 있는 계기였다. 흔히 사역은 내가 고민하고 진행한다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대학 학부 신학생의 사역을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권장하는 것과 유보하는 것 등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길이 있고,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배울 것은 존재한다. 오히려 처절한 고난의 순간은 더 아름다움을 태동시키기도 한다. 다만 부르심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소유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 그분의 부르심에는 학력, 연령, 신분은 무관하기 때문이다. 학부 3학년 20대 초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의아해했다. 필자뿐만 아니라 성도님들도 의아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약한 것을 부르셨고, 부족한 종을 세우셨다. 어쩌면 이 모호한 대답은 진부한 대답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짧은 식견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분의 부르심에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선배로서 조언하고 싶은 점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아니라면 굳이 권하고 싶지 않다. 현장에서 배우는 경험들은 물론 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적 이론의 토대 위에 실천적인 기술들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배운 단편적인 지식들과 경험들은 오히려 사공이 많은 배에 탑승한 것 혹은 고집스럽고 단편적이며 한쪽으로 기울어진 무게 추와 같이 완고해질 위험성이 있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4년 혹은 7년의 기간들이 40년 목회 현장을 짊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역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역과 학업의 병행은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호소하게 만들었다. 말처럼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려웠다. 사역에 집중하면 학업이 어렵고, 학업에 집중하면 사역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아직 구원에 대한 정립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신학생전도사들에게 맡겨진 교회학교 학생, 청년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도 예과 2년, 본과 4년의 실습 등 인턴과 레지던트 등 순차를 밟아서 비로소 의사가 된다. 영혼을 살리는 목회자는 배움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의사만큼의 양은 못 채워도 열정만큼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학업의 기간을 지혜롭게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