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 공허한가? 존재하는 인간은 늘 공허하다. 찰리 채플린에 의하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이는 존재론적 자기 긍정이 비존재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역사 안에 살아가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비존재의 위협, 즉 ‘공허감’이 도사리는 위험으로부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공허감이 존재하는 인간의 삶은 무의미한 삶으로 이끌고 때로는 극단적인 처사에까지 이르게 한다. 하지만 여기의 전제는 적어도 틸리히에 의하면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것은 삶의 공허감은 바로 ‘무의미함’을 전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즉 존재의 의미를 상실함으로써 만들어진 비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상실한 존재의 공허함의 불안은 어떻게 성장하는 것인가? 인간의 의미 상실은 틸리히에 따르면 “각 대상이 의미가 사라지고 창조적인 사랑(eros)이 무관심이나 혐오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대상에 열정을 잃을 때, 노력의 결실이 맺혀지지 않을 그때, 인간은 궁극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불안에 휩싸이게 되면서 정신적 중심의 ‘상실’이라는 사실만을 발견하고, 이로 인하여 더 깊은 불안의 불쾌한 골짜기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공허함과 의미의 상실은 정신 생활에 대한 비존재의 위협이 표출된 것이며... 인간의 소외로 인하여 표면화된다.” 이를 그는 의심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틸리히는 “체계적인 질문에서 체계적인 의심은 효과적이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에 대한 틸리히의 입장을 합리성으로서 표현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비합리적인 것은 삶을 지배한 자만하는 인식으로서 이것은 불안과의 대면을 피해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합리적인 것은 존재에 대한 의심, 즉 데카르트와 같은 진리와 대면하기 위한 합리적인 의심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틸리히의 표현처럼 ‘자신의 신념을 따르기보다는 의심을 용감하게 수용’하는 태도라고 필자는 해석하였다. 합리적 의심은 불안과 마주하고 대화하며 분투한다. 반면에 비합리적 의심은 자기 긍정에 의존하여 극단적인 상황을 피해가지만 결국에는 절망을 경험한다.
절망을 경험한 인간은 결국 의심이라는 위협으로 회피하기 위하여 ‘질문하고 의심하는 권리’와 ‘자기 자신’ 마저 포기해버린다. 이들은 공허감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유에서의 도피를 결정한다. 그들에게 이러한 자유는 위험적 요소이며 실존적인 회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회의를 부정하고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불안이다. 합리적(체계적) 의심을 포기한 그들은 결국 더 큰 불안이라는 감정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근본적인 무의미의 불안의 요소를 어떻게 극복하고 참된 인간이 되는가? 이에 틸리히는 “인간은 의미와 가치에 따라 세계와 자기 자신 속에서 사실을 이해하고 형성함으로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발견 내지는 이러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정신적 자기 긍정’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정신적 자기 긍정의 실현 가능성은 ‘의미들 속에서 참여’할 때 가능한 것으로서 ‘창조적’ 삶에 연결시킨다. 이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일상 속에서 무엇인가 ‘반응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창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반응하는 ‘참여자’이며, 인간은 참여를 통해 완성된 일들을 통하여 자기를 완성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틸리히가 주장하는 “존재론적 자기 긍정과 정신적 자기 긍정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원칙 속에서 불안과 대면하여 의심하고 질문하며 진리에 도달하는 일은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가능성을 지닌 의미를 발전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공허의 불안을 극복하는 정신적 자기 긍정이자, 존재의 용기가 되는 것이다.
본 글은 폴 틸리히의「존재의 용기」中 ‘공허함과 무의함의 불안’을 정리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