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로나(COVID-19)’를 생각할 적에 반드시 생각나는 단어가 한가지 있다면, 이는 ‘사회적 격리’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코로나와 비슷한 경우를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물론 전염병이라는 것은 그 시대만의 특수성의 산물이기에 성서에서 이와 똑같은 예시를 찾을 수는 없을 듯 하다.
그러나 다만 ‘사회적 격리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조금 다를 것 같다. 성서에는 ‘문둥병’이라는 병이 존재한다.
문둥병은,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게르하르트 헨리크 아르마우어 한센’ (Gerhard Henrik Armauer Hansen)이
나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1874년 'Bacillus leprae'라 명명한 말인데, '한센병'이라고도 불린다.
(https://namu.wiki/w/한센병)
그렇다면, 이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피부가 조금씩 썩어들어간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들은 그렇게 썩어 들어가는 자신의 몸의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다.
게다가 이 병은 전염성도 강하다. 그래서 과거 많은 사람들은 이 병을 ‘신의 저주’처럼 취급해서 이들과의 접촉을 꺼려했다.
자신이 아파도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일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고통을 느끼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버겁고 또 지치는 일이지만, 어찌보면 그 고통이 우리에게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에 직면할 수 있어야 그 병을 치료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고통을 고통으로 마주하는 것이 늘 나쁜 일인 것은 아닌셈이다.
나병환자의 처우에 대한 레위기의 법에 의하면(레 13:45),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며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46절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병 있는 날 동안 늘 부정할 것으로,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도록 격리되었다.
이렇게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늘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고 다녀야만 했다.
또 이들은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을 뿐만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고립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나병환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은 무엇일까?
그에게 있어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이상함을 지켜보는 일도 참 슬픈 일이지만, 가장 큰 고통은 어쩌면 ‘사회적 격리’에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는 엄연히 존귀하고 사랑받기 합당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공동체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는 함께 우리와 할 수 없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고통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나병환자들도 한 사람의 사람으로, 지극히 사랑한 사람이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행하셨다.)
그분은 ‘손양원’목사님이다. 한 일화를 소개한다.
![](https://blog.kakaocdn.net/dn/bVgSZW/btqFztJIers/40E9icB3gH2wnFSKfuhfPk/img.jpg)
“그는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개신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환자들 중 상태가 심한 환자들만 격리해놓은 방이 있었다. 간호사들조차 신문지를 깔고 들어가니 그런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환자 중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 라고 외치면서 간호사들 중 하나를 목침으로 때려 죽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맨발로 그 방에 들어가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손 목사는 상처를 직접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한센병이 전염병인지라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양원에서 크게 걱정을 하며 수차례 손 목사에게 검사를 시행했지만 다행히 손 목사는 전염되지 않았는데 이에 손 목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할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https://namu.wiki/w/손양원)
나병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산채로 부패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나병환자. 살아있지만, 점점 더 마음도 육체도 죽어가는 나병환자.
사회로 부터 격리되는 삶을 살아야만하는 나병환자. 참으로 비참하고 비참한 삶이다.
그는 자신이 고통으로 아프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 교회로부터도, 세상으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격리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삶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익숙해지는 것에서는 멀어져야 하지 않을까?
오랜시간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교회로부터 벗어나도 믿음 생활을 유지는 할 수 있다.
이는 신앙의 본질이 교회라는 건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나는 믿음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삶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에베소서(1:23)에서 말하고 있는 바처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은 분명히 ‘교회’안에 있다.
성도가 함께 교제하고, 함께 함을 누리는 놀라운 축복으로 부터 우리의 충만함은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된다.
점점 더 모이기를 힘쓰기에 어려운 코로나 시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저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탄력성” (3) | 2020.07.25 |
---|---|
사람의 마음 (3) | 2020.07.18 |
Compassion (5) | 2020.07.04 |
헤세드 (4) | 2020.06.13 |
‘삶의 자리(Sitz im Leben)’ (3) | 2020.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