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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설 ‘햄릿’ 작품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여러 차례 패러디되고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저 구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어도 저 대사가 왜 나오게 되었는지는 대부분은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 대사는 작품의 주인공 햄릿의 대사입니다. 그가 저런 대사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햄릿에게는 삼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삼촌은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납치해갑니다. 극심한 좌절의 고통 속에서 햄릿은 모든 희망을 잃고 자살한 것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내면 안에 일어난 일은 바로 삼촌을 향한 복수심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나온 대사가 바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입니다. 죽을 것이냐 살아서 복수할 것이냐의 햄릿의 대사는 그의 거듭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죽음이란 삶의 시작에 참여하여 종국에는 삶을 마지막을 장식하는 피날레와 같습니다. 누군가에 삶이란 행복한 미래로 가득 찬 희망일 것이며 누군가에는 불행하고 답답한 고통의 시간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누군가에는 죽음은 새로운 소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현실의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잘 살고자 하는 욕구와 잘 죽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정상적인 환경과 정상적인 출발점에서 시작된 사람이라면 잘살고 잘 죽고자 하는 욕구를 안 가져본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불행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듯이 다 ‘잘 먹고 잘살고자 하는 일’입니다. 임종의 순간을 평안하고 명예롭게 보내길 원하지 고통받고 피해주며 임종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로마서 8:1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고백은 마치 조국 앞에 자신의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을 연상시키며, 일제 강점기 시절 순국선열들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먹고 사는 문제로, 누군가는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하여 고민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확실한 목적을 지닌 자에게는 먹고 마시는 일과 죽고 사는 일은 부차적인 것일 것입니다. 그 인물은 바울이 아닌가요? 그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행20:24)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의 고민의 흔적을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막연한 삶과 죽음의 문제, 무엇을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할 수 있는 지혜로운 흔적들이 삶에 묻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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