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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봉

행동 없는 깨끗함은 이 세상에 없다

*본 글은 2020년 서울신학대학교 총학생회 주관 <온라인 성화제: 시론(時論)경진대회>에 출품한 글입니다. 

 

*주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와 한국 사회 경비원 및 청소 노동자의 인식 고찰

 

P. S. 요즘, 학기를 맞이하여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져서 다른 곳에 기고한 글이나, 학교 과제로 작성한 글을 많이 올리네요...^^;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ㅠㅠ 나중에 다시 포스팅에 만전을 기할 날이 올 것입니다..!ㅎ

 

 

 

John Wesley (1703~1791)

 

행동 없는 깨끗함은 이 세상에 없다

 

 

      깨끗함. 이 단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공중화장실을 들어설 때 깨끗해야 기분이 좋고, 아파트 길가를 거닐 때 깨끗해야 마음이 상쾌하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서도 예외가 아니다. 객실에 입장하였는데 주위가 불결하면 일단 얼굴부터 찡그려진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첫 열차에 탑승하면 윤기 나는 바닥을 볼 수 있으며, 좌석버스에 올라타면 모든 의자와 안전벨트가 가지런한 상태로 승객을 맞이한다. 대학에서는 어떠한가? 아무리 많은 학생의 손과 발을 거쳐도 강의실은 늘 깨끗하며 책상과 의자가 정돈되어 있다. 동아리를 비롯한 각종 모임에서 늦게까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도 다음 날이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대학 수업 1교시는 오전 9시, 아파트에 거주하는 직장인의 평균 출근 시간은 이른 아침 7시, 지하철 첫 열차의 출발 시각은 새벽 5시이지만, 누군가는 그보다 일찍 도착해서 무언가의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깨끗함을 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깨끗하게 하는 이들은 정작 깨끗하지 않은 사회 안에서 사는 것 같다. 지난 5월, 서울 강북구에서 한 아파트 경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어느 입주민으로부터 소위 ‘갑질’을 당해왔다. 갑질을 일삼은 가해자는 경비원이라는 직책이 해고하기도 쉽고 고용하기도 쉬우며, 주민들의 민원에 꼼짝없이 복종해야만 하는 ‘을’의 자리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게 그는 폭력을 행사했다. 물리적 폭행, 무분별한 모욕, 해고 협박, 고소할 테니 변호사와 재판 비용을 준비하라는 거짓 발언은 이내 피해자의 인격과 삶을 짓밟아버렸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형제, 주민들에게 선한 이웃이었던 경비원은 결국 두 딸에게 사랑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약 1년 전, 서울대학교 제2공학관의 청소노동자가 휴게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폭염이 한창이었지만 청소노동자의 휴게실에는 에어컨은커녕 창문조차 없었다.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청소노동자는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결국 쓰러졌다. 아파트 경비원, 청소노동자, 주차관리인, 간병인……. 이러한 사람들은 흔히 ‘임계장’이라고 불린다. 임계장이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고용 기간이 일시적이며 직업 연령층이 고령인 노동자들을 나타내는 신조어다. 이들은 주로 직업 환경이 취약하며, 처우가 불안정하고, 사회적인 편견을 받는가 하면, 갑질의 주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고용과 해고가 쉽사리 이루어지는 까닭에 어디엔가 하소연할 수도 없다. 불만을 제기하는 즉시 생계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편 누군가는 그들의 노동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비난을 일삼는다. “나이 들어 취직한 주제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이라는 망언을 내뱉는가 하면,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가슴에 못을 박기도 한다. 임계장이라 불리는 이들 역시 누군가의 부모님이자 형제, 친구인 ‘평범한 사람들’ 뿐인데 말이다.

 

      사회 곳곳에서 그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와중에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흔히 신앙의 척도는 교회에 출석하는 횟수 혹은 기도하는 시간, 교회 내에서 어떠한 직분과 역할을 맡고 있는지에 따라 판단된다. 물론 이와 같은 요소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신자(信者)의 의무는 개인적인 경건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까지 포함한다. 사회적 성화란 공동체적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 밖 사회적 문제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행위를 지칭한다.[1] 존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믿음과 행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의 사회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라는 말씀은(약1:27)[2] 무시한 채 정치적 이익, 교세 확보, 물질적 탐욕에 눈이 멀지는 않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오늘날의 교회는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가? 솔직히 본인조차 할 말이 없다.

 

      기독교인의 관심이 더 이상 ‘나’ 혹은 ‘교회’라는 울타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 코로나19라는 시대적 재난 속에서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하는지 살펴야만 한다. 이 순간에도 비정규직 경비원, 청소노동자를 비롯한 수많은 ‘을’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입을 열 수가 없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려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러한 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곁을 지나가면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거나, 작은 호의와 선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도 좋다. 또한, 각자의 사회적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며, 관련 법안이 제정되도록 참정권 혹은 결정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교회, 나아가 기독교계 수준의 논의와 담론 형성도 시급하다. 현 시대적 정황에서 교회와 목회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운운할 게 아니라,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묵묵히 보여주어야 한다. 주위가 더럽다고 불평만 하고 있다면 절대 그곳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쓰레기를 줍는 누군가가 있어야 비로소 깨끗해진다. 지금까지 사회가 불공평하고 교회가 타락해간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우리 역시 그저 듣고 넘긴다면 자정 작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과 말들, 그리고 본 글은 언젠가 반드시 공동체적 실천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행동 없는 깨끗함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각주>

 

[1] 박창훈,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에 대한 재고찰”, 「한국교회사회학회」 30 (2011), 141-145.

[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야고보서 1장 27절 中)

 

 

(삽화=김용민 기자 kym5380@biz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