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 기니스의 르네상스 요약
오스 기니스의 르네상스는 기독교 문화가 서구의 영향 아래 어떻게 발전하고 퇴보했는지, 그리고 무너진 기독교 문화 르네상스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그 의미와 역사를 재고함으로써 기독교의 사활을 건 투쟁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다. 작금의 기독교 교회 현실은 어디서나 수세에 몰려 있고, 기독교 신앙은 우리 사회의 사상적 지도층에게 조롱당하고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다. “서구는 전체주의적 야망인 독일 히틀러의 자칭 지배 인종과 소련 스탈린의 자칭 지배 계급을 둘 다 물리쳤다. 하지만 지금 서구는 작금의 세 가지 위협 세력 앞에 나약해져 자신감을 잃고 있다... 첫째, 이슬람교리의 지배종교, 둘째, 편협한 자유주의의 철학과 제로섬 전략, 셋째, 문화적 혼돈이다”(23)
오스 기니스는 현대의 시류를 특별히 ‘발전된 모더니즘’으로 이해하는데 인류의 계몽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회 구조와 사상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문화적 부흥을 새로 맞이할지를 주장한다. 르네상스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 어원적 의미로는 단순히 중생을 뜻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적 개념이다. 저자는 새로운 기독교 르네상스를 주창하며 이 운동의 패러다임을 하나의 구호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전제 아래에서 책을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맞이하는 현대는 세계화의 발흥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화란 인간의 상호 연결이 진정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는 과정”(43)이라 설명했다. 그렇다. 이제 세상 어디서든 인류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실현시킬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 교회의 대과업을 3가지로 주장한다. 첫째는 남반구의 준비를 돕는 일이다. 남반구의 교회는 아직 모더니즘 이전의 상태로서 교회를 세울 뿐 아니라 서구가 경험하여 패배했던 모더니즘의 도전으로부터 맞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둘째는 서구 세계를 다시 예수께로 되돌리는 일이다. 제 1의 서구 선교는 로마 제국의 회심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서구 교회도 무너졌다. 그때 제 제2의 서구 선교가 준비되었고 이는 야만 왕국들의 회심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의 선교가 희미한 불빛 아래 생명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 일을 도와야 한다. 셋째는 인류의 미래에 기여하는 일이다. 산업화로 인한 비참함과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인한 총체적 야만성 더불어 현시대의 세계화의 추세들은 기독교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세속적인 자본주의 폐해와 전쟁으로 인한 갈등과 죽음, 범죄와 질병 등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기독교와 문화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문화란 “공동의 생활방식”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로서 그분의 생활방식대로 살라는 명령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의 생활방식은 문화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기독교는 신빙성과 실현성을 갖춰야 한다. 신빙성의 차원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 주장이 사실인지를 파악하는 여부이며, 실현성의 차원은 신앙이 가시적으로 실천될 수 있도록 돕는 영역이다. 기독교인은 빛과 소금의 역할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한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서구 세계의 쇠퇴기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서구는 어떤 문명도 필적할 수 없는 문화를 창출하고 세계화의 혁신을 주도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서구는 기독교 선교의 원산지로서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여러 문화들을 발전시켰다. 엄밀히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의 개연성은 낮아보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를 강력하게 부정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기독교 공동생활이 만들어 낸 문화는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과 문화를 발전시키겠는가? 저자는 이를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사람을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우리는 복음의 화신이 되어 그 진리의 특성과 형체를 표출해야 한다. “그렇게 진리 가운데 살아갈 때 거기서 문화적 능력이 발휘된다.”(101) 특성은 기독교 사상을 뜻하고 형체는 사회적 실천의 가시적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긍정함과 동시에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세속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대한 경멸만을 기독교의 덕목으로 정당화시켰다. 우리는 이러한 불균형을 재조정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은 다르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요17:11, 14, 16)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다.(롬12:2) 교회는 “지적, 사회적 긴장을 유지하여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 비판적 거리를 둔 참여가 가능해진다. 바로 이것이 문화를 형성하는 교회의 능력의 원천이다.”(114)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첫째, 늘 세상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둘째, 세상을 분별하도록 부름받았다. 셋째, 세상을 거부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래서 반드시 회심으로 인한 개인적 혁명은 공공의 사회적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더 세밀한 차원에서 문화를 변화시키는 사건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함께 인간의 비중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시다(사55:8-9절) 그렇지만 인간의 지혜를 간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말대로 이것은 ‘해 아래’의 지식이다. 이 세상의 도성의 방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도성의 지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최종 권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도성 방식의 교훈을 수용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성의 방식에 따라 성경의 최종 권위를 인정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체험해야 한다. 아프리카와 유럽,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과 모든 선교사 운동의 시작들은 성령의 사역이었다.
서구의 쇠퇴와 교회의 세속화 속에서 우리는 시류에 편승하는 자명한 사실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아직 우리에게는 황금기가 남아 있음을 천명한다. 정교회는 교부 시대를, 가톨릭은 중세 시대를, 개신교는 종교개혁을, 복음주의는 제1차 대각성 운동을, 오순절파는 아주사 거리의 부흥을 떠올린다. 작금의 현실은 종교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간이다. 그러나 “가장 어두운 시간이 곧 동트기 직전이다.”(179)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물으신 하나님은 그분의 뜻과 계획대로 그분의 일을 하신다. 우리는 에스겔의 대답처럼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고백과 더불어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에 참여해야 한다. “진리 가운데 살아가면 반드시 불가항력의 결과와 변화가 따르게 되어 있다.”(201) 예수의 다시 오심이야말로 새로운 황금기이다. 새로운 기독교의 르네상스가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는 용기와 믿음으로 이 시대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201) 그분이 하실 수 있다. 그분이 하실 수 있기에 우리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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