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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

읽기 시작한 이유



교양없는 나에게


신학교에 오고자 했을 때 사실 난 학문에 관심이 있는 상태 였다. 내가 신학교에 가고자 했던 이유도 학문적인 신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 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이 입학하면서 학교 커리큘럼을 통해 살짝 당황시킨 일이 있었다. 우리학교는 학과 커리큘럼상 1학년이 듣는 전공이 없었다. 타학교 들과 비교해보아도 아예없는 학교 였다. 학과 커리큘럼을 자세히 못본 나의 잘못인거다. 그렇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공부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게된건 1학년 교양과목들을 듣고였다.

1학년 대상이 전공과목도없고, 같이 다니던 친구들도 당연하게 전공수업보다는 채워야할 교양과목 우선으로 채워 듣는것을 보고 나 또한 그들과 유사한 시간푤 짜려고했다. 그렇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그 계획이 틀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직도 기억된다. 학교에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동기들이 가는 피씨방을 따라가서 수강신청을 했다. 수강신청을 그럴듯하게 짜놓고 대기했다. 실패했다. 꼭 들어야지 해야할 과목을 못듣게 되니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일명 이삭줍기를 시전했다. 꾸역꾸역채워진 나의 시간표는 필수과목 2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과목이 선택과목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단체 채팅방을 보아도 어디도 나와 같은 시간푤만든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기숙사 입사후 나의 시간표를본 룸메이트 형님들은 하나같이 걱정을 하셨다. 아마 본인들도 보지 못한 과목을 신입생의 시간표에서 보게되었으니 더했을 것이다.

내 1학년1학기 시간표와 같은 것을 보았다 생각만해도 아찔; /출처: 에브리타임



쥐 구멍에도 볕뜰날이 있다고 했던가 정정기간을 거쳐서 어느정도 구색을 갖춘 나이 시간표가 되었다. 하지만 제일 없애야 할 과목들은 끝끝내 사라지지않고 수강을 해야했다.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내가 ‘공부’하고자 맘을 먹게된 수업들은 이러한 실패속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교양지식을 위해 들은 과목이 아닌 그저 학교의 졸업요건이라 듣게된 수업들 속에서 나는 길을 본것이다.여담이지만 당시 내가 들었던 과목 몇가진 폴봉님을 비롯한 필진들과 듣게된 수업들도 있다. (하하) 교양들이 다른 대학과는 조금은 다른 베이스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내가 졸업한 학교가 신학교치곤 일반학과과 굉장히 많았다. 또 다름은 그럼에도 기독교에 관련한 교양들이 다수를 포진하고 있었다. 그런의미에서 학제간 연구의 결과물된 수업들이 많기도했다.

나의 다른 글들을 읽고온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뜨거운 예배에 대한 열정으로 학교에 온것이 아니였기에, 오히려 수업을 들음에 있어서 마치 존웨슬리(감리교 창시자)가 경험함 가슴에서의 뜨거운 무언가를 수업시간에 경험했다. 수업은 안듣고 졸았나 싶지만 아쉽게도 그렇진 않았다.
수업 중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직업에 대한 소개를 ‘받는’ 수업도 있었다. 학생들이 소개하는 것이아닌 관련분야 종사자분들이 와서 수업을 진행하는 일종의 특강 형태였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강연자 분들의 신앙과 삶의 치열한 고민을 볼 수 있었다. 자연스레 나에게 전가된 그 치열함은 공부로 이어지도록 도와주었다. 지금의 내가 사회학과 기독교세계관을 공부하는 것도 이러한 수업들의 경험을 통해 나아가고 있는 걸음인것 같다.

이외에도 충분히 독자분들의 구미를 당기게할 수업들이 많았다. 가령,종교학과 관련한 수업에서 나는 객관화된 수업에서 신학함이 무엇인지 구체화 할 수 있었으며, 과학과 같은 현시대의 도전적인 학문들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가 현대의 언어로 쓰여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물론 이들 학문과 수업명의 매력도 있었지만, 이 수업을 이끌어간 교수들의 노고도 남달랐다. 이들. 또한 신앙안에서 치열한 삶이 결과물을 우리에게 쏟아냈기에 나에게도 그런 부분들이 전달되고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두세사람이 모인 곳에


이러한 나의 다짐을 ‘공부함’이라는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던것은 공동체가있었기 때문이다. 학생회와 같이 행정적인 공동체에는 참여해보지 못했지만 학교 내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은 되도록 참여한 것 같다. 동아리, 각 종 스터디, 해외봉사, 독서모임(이건아마 우리학교만의 특수성있는 공동체중 하나인것 같다.)등 공동체 속에서 나는 여러사람 문화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의 대화(언어적소통을 포함한 모든행위)속에서 나의 신학함 혹은 공부함이 나한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전달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이 활동들이 끊임없는 자극이 되었고, 이런 공동체의 결과로 지금 글쓰는 소년들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학교에 와서 공부한다는 것은 이전까지의 수험공부와 연관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앉아 목표치를 잡고 하는 것을 넘어서야한다. 그 넘어서는 ‘공부함’은 나를 넘어서 연결된 타인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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