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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

다이아몬드


   공부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 때로 불안의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긴다. 학업에 대한 두려움은 막연함의 불안으로 이끈다. 이는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눈을 감게 만든다. 「질서너머」를 기술한 심리학 교수 조던 피터슨에 의하면 “가능성의 인식은 현실의 세계를 만든다.” 학업에 막연한 불안은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며 현실을 파악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학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의 공포가 있었다.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지금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심리적 요인이 있었다. 먼저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수준에 못 미치는 나의 한심한 수준에 답답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순간 외부적인 요인들을 과감 없이 수용하게 만들었다. 교회 사역 하느라, 다른 단체에서 활동 때문에,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갖가지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내어 공부할 수 없다는 외부적 상황에 그 탓을 돌리기도 하였었다.

   위의 여러 이유들과 더불어 내게는 공부에 매진할 수 없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학에 대한 흔들리는 나의 마음 때문이었다. 목회자로서의 부르심과 그 확신을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에 확신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부르심에 대한 진지한 고민 앞에 학업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심에 대한, 목회자가 된다는 사실 앞에 나의 두려움을 용감하게 마주하는 하나님과의 치열한 얍복 강 사건 이후 하나님 앞에 진실로 쓰임받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을 기도하게 되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감동을 주셨다. “의사는 사람의 육체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잠을 쪼개고 그렇게 치열하게 버티고 이겨내는데 사람의 목사는 육체적인 생명뿐만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는데 최소한 의사만큼 혹은 그 이상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은 지성적인 준비를 소홀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에 준비는 여러 차원에서 필요하다.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등 말이다. 그러나 지성적인 준비에 소홀했던, 어쩌면 무관심했던 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게 하셨고, 공부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를 갖게 하셨다. 초기에는 어려웠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늘 나의 기도제목은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목회에 대한 부르심의 확신을 얻고 마음의 자세를 고쳤을 때 하나님은 나의 학업의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기를 구하는 자에게 그의 길을 열어주신다. 좋은 스승을 통해 공부할 수 있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균형 있는 학업과 방향 설정을 가르쳐주셨다.  

   학업이 초기에는 어려웠지만 좋은 스승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제는 좀 더 성숙한 독서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의 생각이 상당히 편협하고 무지하다는 겸손을 배우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와 성품 그리고 신비를 자연, 즉 세계 속에 숨겨두셨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성령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우리는 다른 학문을 통한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 역사, 수학, 철학, 문학 등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발견해나가고 있다. 초월적인 하나님이 역사 안에 내재하신다. 성결교단의 주요 신학자 웨슬리는 그의 신학 방법론을 네 가지로 드러낸다. 성서, 이성, 경험, 전통, 물론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지만 이성, 전통, 경험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포괄적이고 수용적이며 인격적인 방법으로서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 신학 외에 다른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나눌 것은 여기에는 한편으로 배타적이고 고집스럽게 보이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적인 성격에 대한 오해를 풀어준다는 사실이다. 개신교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교회 밖의 구원은 없다”는 복음의 왜곡에 맞서 당시 로마가톨릭의 교황지상주의와 교권주의로부터 탈피해왔다. 이는 교회 밖의 구원을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 밖으로, 즉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거룩한 구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세속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담대하게 맞서는 용기를 뜻한다. 그러려면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도, 대화할 수 있는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칫 고집스러워 보이는 교회 이미지와 메시지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 잠재적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 폴 틸리히에 의하면 그들은 가시적인 잠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그들과의 성숙을 대화와 담론을 위해 학업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동일한 원소를 갖는다. 동일한 원소에서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이유는 탄소의 배열 때문인데 이는 “열과 압력을 얼마만큼 견디느냐”의 싸움에 달려있다. 이를 견디면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석탄이 되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목표가 있다면, 열과 압력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신학과 타 학문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마성적인 위협이 아니라 우리를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가치는 나의 결정에 따른다. 최악의 결정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으며 학업에 대한 이러한 결정과 최선이 석탄이 아니라 다이아몬드였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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