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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

오늘의 선택이 만든 미래(방황과 미래)

 

 


   “미래는 창조하는 것이다. 미래는 오늘의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공간의 미래」를 저술하신 인문 건축가 유현준교수의 말이다. 물론 유현준교수의 말은 공간학적인 측면에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인간의 잠재되어 있는 선택이라는 가능성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취지에서 말한 것이다. 필자뿐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오늘은 과거의 순간과 선택들이 만든 ‘나’이다. 필자도 오늘의 내가 있기에 과거의 모든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날 수밖에 없었음을 상기해본다.

   신학의 꿈을 꾸고 본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의 어설 픈 열정은 금세 식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가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무엇이 나의 발목을 잡았을까?” 생각해보면 무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적이 누군지 모르는 무지의 상태는 이토록 나를 깊은 소외와 방황으로 이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신학교 입학 당시 한국 교회를 변화시키려는 원대한 목표보다는 하나님이 쓰시는 참 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신학교는 나의 필요를 채우는 영성사관학교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학교는 영성과 지성, 인성과 감성의 총체적인 훈련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특히 신학적으로 더욱 준비시키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교회에 영향 아래 영성적인 훈련에 지나친 집착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외의 것들은 나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 장애물이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영성 훈련 외에 다른 것들을 등한시여기는 나의 태도가 나의 방황의 경종을 울렸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배타적인 사고방식은 나를 방황의 깊은 수렁으로 이끌었다. 이는 더불어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자신감마저 흔들었고, 어느덧 세상과의 타협까지 이끌었다. 이는 곧 학업에 대한 방황과 신앙에 대한 방황을 불러 일으켰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사고가 사람을 얼마나 고집불통으로 만드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적도 모르고 나도 제대로 모르는 이단아였던 것이었다.

   이런 방황 속에서도 나에게는 영적 목마름이 있었다. 그리고 앞길을 주님께 맡기며 그분의 인도함을 계속적으로 구했다. 이러한 갈증은 곧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배움은 있었지만 갈 길을 몰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좋은 선생님들 만나는 것과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구하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나의 앞길을 인도하셨다. 입학 당시에는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헤맸다. 신학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 학교에 두드러진 성서, 조직, 실천 신학의 범위에서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기도하면서 점차 배워갈 수 있었다.

   학문을 더욱 깊이 배우며 깨다는 것은 편협적인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군지 알지만 적을 모르는 일은 위험하다. 반면에 적을 알아도 나를 몰라도 위험한 일이다. 독단은 독선이 되고 이는 독이 되어 어느 순간 나의 심장을 멎게 만든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다. 배타적인 사고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겸손하게 나를 만들어가셨다. 상대적인 겸손이지만 그 가운데 성령께서는 나의 그러한 방황의 늪에서 나를 건져주셨다. 영적 현존의 빛이 나를 비추니 내 앞의 돌다리를 볼 수 있도록 해주셨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선택할 수 있었다. 방황의 깊은 늪으로 가는 편협적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이를 떨쳐내고 숲을 볼 수 있는 수용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자기 독선은 결국 나를 배타적인 좁은 길로 인도하였다. 덕분에 학업에 진지하게 임할 수도 없었고, 세상과의 타협과 신앙의 불안을 계속적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겸손 속에서 주님의 인도함을 구하며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나는 맞고 그 외에는 틀리다는 자기 교만은 결국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 나의 옳음을 내려놓고 수용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중요했다. 조던 피터슨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오늘의 초보자는 내일의 명인이 될 수 있다.” 배우려는 수용의 자세는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 자기를 넘어선다. 깊은 방황이라는 어두움은 빛에 민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내 믿음의 선택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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