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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

말씀 그 어딘가에서


목회자가 되기를 결정하고 나서는 ,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기보다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왔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기로 결정한 내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
내가 집중해야겠다고 결정지었던 것은 ‘말씀’‘기도’였다.
사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뻔하기에 ‘정론(正論)’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수평적인 것으로
내적인 친밀감과 인격적인 관계성의 측면이 강하고,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계시로써 수직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느꼈다.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을 경시할 수는 없지만
기도는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측면에 반해,
말씀은 좀 더 공공성이 강하게 대두된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그렇다면, 목양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목회자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기도’보다는 공적인 특성이 강한 ‘말씀’에 치중되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내게 맡겨진 가장 큰 역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성경’ 그 자체를 공부하기를 결심했다.
그렇게 “어떻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마음을 대언할 수 있을까?”가 내 주된 관심사가 됬다.

말씀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학문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설교학’, ‘성서해석학’, ‘신약학’, ‘구약학’ ‘배경사’ 등등..

솔직히 말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더 심도있게 공부할 지, 혹은 이 모든 것을 조금씩 다루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본문 그 자체를 해석하는 ‘성서해석학(hermeneutics)’에 있다.
성서는 다양한 문학작품들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시, 묵시, 애가, 예언, 편지, 법, 서사 등등..)
이러한 다양한 장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기초로 되어 있어야하며, 양식과 배경 그리고 언어 그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번역본 (새번역, 개역개정, 공동번역, NRSV, NIV, 등등..)에 따라 받는 느낌이나 뉘앙스의 차이도 나타난다.

또 일부는 해석상의 심각한 차이도 나타나는데 단적인 예시로, 이전에 이런 해석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로서 비난하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칭찬하셨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영지주의적 요소들이 많이 녹아져 있는데,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적인 존재로 바라보길 원했고,
오직 도마만이 예수님을 살아계신(육적인) 존재로 받아드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 ‘보다’ 라는 헬라어 ‘호라오’와 ‘에이도’이었는데
‘호라오’는 영적인 봄을 의미한다면, ‘에이도’는 육적인 봄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호라오’했다고 했으나, 도마는 ‘에이도’로 봐야 믿겠다는 것.

(사실 이 이야기는 내가 언어공부하는 목사님이 말씀해주신 것이지만.. 확실한 근거도 없고, 아직 내 실력으로 이것의 진위여부를 파악할 능력도 되지 않는다.
다만,이런 비슷한 해석상의 오류들과 번역상의 문제들을 종종 접했기 때문에 필요성의 차원에서 제시하는 예시일 뿐이다.)

또 다른 신박했던 해석은 ‘에스더’와 여신 ‘이쉬타르’ 의 연관성(자세히 살펴보면 자음이 ㅇ,ㅅ,ㄷ(ㅌ)으로 똑같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음) 이나 주기도문의 해석에 대한 것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말씀이 삶으로 체화되는 것을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있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의 소원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