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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이 던지는 조언

글의 안목

 


   막막함,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여 배치고사를 치르던 때를 기억한다. 사실상 공부를 시작조차 안했던 그 시기, 시험 후 받았던 충격으로 인하여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될 것인가 막막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께 부탁드려 처음으로 과외를 끊고 1차 방정식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했던 그때 앞으로의 길에서 얼마나 큰 산들을 넘어야 할 것인지 막막했다.

   고등학교 1학년 배치고사 이후 받았던 막막함의 충격만큼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시기가 바로 신입생시절 아닌가 싶다. 수험생 시절 공부를 가까이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면 본격적인 나의 학업은 대학교 시절부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생각과 너무 다른 상황이었다. 지금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되는지 그 막막함이 나를 사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신학교에 오면 성경만 그리고 성경을 더 체계적으로 배우는 줄 알았다. 목사님과 성경공부 심화과정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번 주제는 그때의 나의 막막함을 토로하는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서론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그러나 이런 서론을 달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신학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 “‘나’와 같은 마음을 품은 이들이 더러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걱정 때문에,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걱정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현실의 문제에 부딪칠 때 우리는 이를 너무 쉽사리 포기하거나 혹은 신학을 폄하 그리고 부정하는 단계까지 이르기도 하는 것 같다.(물론 소수의 사람들이다)

   공부의 방식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추천한다” 자신 있게 말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공부의 자세에 대해서는 꼭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 “쓸데없는 공부는 없다.” 이 말의 의미가 얼마만큼 와 닿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공부도 편식이 있다.(물론 필자도 있다.)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말자. 혹은 나와 맞는 어떤 종류의 학문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만 고수하지도 말자. 물론 아직 끝을 알 수 없지만 ‘나’의 생각에는 신학의 모든 종류는 결국 하나님으로 또한 교회로 귀결된다. 따라서 포괄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필자의 학업 목적은 학부 4학년부터 현재까지 동일하다. “신앙하기 위하여 신학 한다.” 잘 믿고 싶어서 최선을 다한다. 잘 가르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는 그래야 할 것이고, 이에 ‘나’의 마음이 충실하지 못하다면 ‘나’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실패한 것이다. 둘 중에 하나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몸이다. 따라서 편식할 필요도, 무시할 필요도 없다. 겸손과 수용의 자세는 늘 우리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된다. 그러다보면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보이지 않을까 싶다. 난 그렇게 발견했고 우리 학교 주 전공인 성서, 이론, 실천의 경계를 학부시절 여기저기 넘나들면서 배우게 되었다. 난 그렇게 내 관심사를 찾았고 다들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모든 공부가 기초가 중요하겠지만 신학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떤 전공이든, 주제이든 개론을 열심히 읽고 배우라. 개론을 열심히 공부하면 숲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숲을 보면 나무도 보이고 그 안에 사는 자연 생물체도 볼 수 있다. 단편적인 것으로 전체를 보는 왜곡된 시각을 접어두고 전체적인 시각으로 단편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글의 안목이 생기면 읽는 안목이 생기고, 쓰는 안목이 생긴다. “지혜롭게 구분하고 결정하는 일이 수월해질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