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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

신학생 제1의 우선순위는 누가 뭐래도 학업이다

 

     이 책을 집어 들고 읽는 사람이라면 신학대학(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학생의 우선순위에 관하여 이야기해보고 싶다. 신학대학이나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준비하는, 혹은 다닐 예정인, 아니면 재학하고 있는 독자들이여. 신학생의 우선순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더욱 신실한 믿음을 가지는 것? 옳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근데 그것은 비단 신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님이나 집사님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갖추어야 하는 점이다. 그건 신학생만의 일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럼 신학생이 준비해야 할 것은 뭔가? 달리 말하자면, 신학대학(원)에 다닌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떠한 점을 갈고 닦아야 하냐는 의미다.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게 내릴 수 있다. 정해진 답이란 없다. 누구는 설교를 잘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또 누구는 전도를 잘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많이 읽거나, 다수의 구절을 암송하는 것이 신학대학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간혹, 개척교회로 시작해서 초대형교회까지 만드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 신학대학(원) 최고의 목적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본분은 바로 ‘학문(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신앙은 디폴트(=기본값)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차분하고 진지하게 ‘내가 신앙하는바’를 탐구하고 관찰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은 다양한 주제로 나뉠 수 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기독교 교리, 교회의 역사, 그리스도인, 예배, 성경이 전해 내려온 방식, 과거의 신학자들, 철학적 사상 등…… 이외에도 여러 주제가 있다. 신학을 배운다는 것은 이렇게 방대한 영역의 지식과 정보를 아무런 사고 없이 머릿속에 집어넣는 행위가 아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마치 일종의 ‘사고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경 어디를 읽고 해석할 때, 설교하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교리적인 문제를 판단할 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신학적 사고’를 한다. 설사 자신이 그러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올바른 신학적 사고’를 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때때로 어떤 신학적 사고방식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나 위협이 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느 학생이 신학대학에 입학했다고 치자. 그 학생은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들었다. “교회의 머리는 그 교회의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학생이 신학대학교에서도 교수자에게 비슷한 강의를 듣는다. “너희들, 나중에 사역 나가면 담임 목사님한테 무조건 복종해라.” 이러한 식으로 말이다. 그럼 이 학생의 ‘신학적 토대’는 [목사 = 하나님]이 된다. 나중에 이 학생이 목사가 되고, 담임 목사가 되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새로운 ‘하나님’이 태어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예로 설명했지만, 요점은 신학이 바로 이처럼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요한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생은 다양한 신학적 이론들을 습득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지식을 간단하게 훑어봄으로써, 앞으로 자신이 어떠한 잣대를 가지고 살아갈지 고민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내가 굳게 믿어왔던 통념에 대해서도 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답하는 과정은 ‘내가 신앙하는바’를 더욱 명확하게 해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믿음이 없어서’ 실행하는 게 아니다. 신학생으로서 생각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목회자는 교회 안의 사람들만 만나면서 살지 않는다. 때로는 비종교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가치관도 생각해볼 줄 알아야 한다. 설령, 어떤 목회자는 교회 안의 사람들만을 만나면서 생활한다고 치자. 교회 안의 사람도 개인마다 다른 신앙관을 갖는다. 그렇기에 신학생은 무엇보다도 ‘학문’에 우선순위를 두고 힘을 쏟아야 한다.

 

공부하며 끊임없이 '사유'하기

 

     그런데 적지 않은 신학생들이 신학대학교 혹은 신학대학원을 그저 ‘훈련소’ 정도로 여기는 듯싶다. 쉽게 말해 목회 훈련소처럼 말이다. 목회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언변이나 기술, 동기 부여, OO하는 방법(빈칸에는 ‘교회 성장/부흥/전도’ 등의 키워드가 들어갈 수 있다) 등에 관심을 많이 둔다. 이러한 현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한때는 그랬으니까. 그때는 세미나라는 세미나는 아주 다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소들에 주목하게 되는 과정과 배경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막상 사역지에 나가면, 담임 목사나 부목사들은 항상 무엇을 할 줄 아냐고 물어본다. 신임 전도사의 신학적 소양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신변잡기의 능력을 요구한다. 이 같은 상황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겠다.

 

     허나, 나는 신학이 현장 친화적인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신학대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고작 ‘잡(雜)기술’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대학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있다. 현재에도 수많은 교회에서 그칠 줄 모르는 세미나들이 개설되고 있다. 방학만 되면 각 신학대학이나 교회, 선교단체의 게시판을 보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수히 많은 ‘기술’과 ‘훈련’ 등을 교육한다는 포스터들이 즐비하다. 당연히 여기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어느 지도자들은 이런 훈련에 참가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 마냥 홍보하기도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세일즈맨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만났던 여러 사역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신학생 때 공부를 많이 해놓으라고” 말이다. 물론, 대학에 다니는 신학생도 바쁜 건 매한가지이겠지만, 정말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순간은 그때뿐이라고 한다. 당연히 졸업 후에도 열심히 사역과 학업을 병행해나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마음 놓고 학업에 몰두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신학생 시절’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목회 사역을 해봤던 신학(대학원)생이라면 더욱 실감하리라고 예상한다. 고작 파트 타임으로 사역을 해봤던 나조차도 ‘공부할 시간이 정말 없구나’를 생생하게 느꼈으니 말이다. 선교단체나 동아리, 교회에서 진행하는 OO훈련, OO학교, OO세미나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좋다. 그걸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학업에 방해가 갈 정도가 되면 안 된다. 당신이 현재 신학생이라면 더더욱이 말이다.

 

만약, 신학대학을 훈련소라고 부르고 싶다면, 신학생의 총은 '신학'이 되어야 한다

 

     신학생 때에는 준비해야 하는 게 정말 많다. 이 글을 읽는 예비 신학생인 독자들도 똑같이 느낄 것 같다. 하지만 학생의 우선순위는 반드시 정립되어야 한다. 신학생 제1의 우선순위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학업(신학 공부)’이다.

 

 

P. S. 목회자가 아닌, 다른 직업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고자 하여, 그러한 관련 업무 능력을 키우려는 신학생이라면, 꼭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에게는 선택 사항일 뿐이다. 내가 상정한 독자는 ‘목회자 후보생’으로서의 신학생으로 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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