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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한 준비들

BC와 AD


   신학이 아니라 신학과를 졸업한 후 주변이 많이 달라졌다. 필자는 물론 학부 신학을 졸업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 바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신학대학교를 졸업 후 목회와는 전혀 다른 일을 혹은 특수 목회를 다른 이들은 방황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통계를 낸 것은 아니기에 경험적으로 직감하기로는 2-30%?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줄자로 재지 않고 즉각적인 순종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목회의 길에서 다른 일을 혹은 다른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신학과를 전공한 이후 대학원에 입학하여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결심만 점철됐을 뿐이다. 대학원에 입학한 19년도 당시 우리 대학원은 세부전공을 본인의 자유로운 결정 아래에서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론신학을 전공으로 선택해서 많은 수의 이론 신학적 과목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론 신학은 그 카테고리를 분류하자면 교리신학(교의), 역사신학, 공공신학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보다는 철학에 좀 더 관심이 있었고 교회와 구원, 칭의와 성화 등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나의 상황에 맞는 세부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신학을 전공하기 이전 개인적으로 참 뜨거운 심장을 가진 ‘영성인’이라고 생각했다. 입학 후 함께 신학을 공부하던 친구들을 보며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많이 실망했을 정도였다. 나는 성경도 매일 읽고, 기도도 2시간씩하고 각종 행사 교회 봉사와 전도에 열심 있던 사람이라 그런가 모르겠다. 그때는 그것이 율법인줄 몰랐다. 내게는 신앙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열심이 공존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겸손을 가장한 위선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한 것 중에서 내게 가장 유익했던 것은 나의 형식적인 신앙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매서운 책망의 말씀이다. 욥은 당대의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선한 자였다. 그는 자신의 교만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친구들의 질책 속에서 자신의 죄 없음을 변론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38장부터 41장 그를 책망하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38:4)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착각과,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는 교만은 자신의 경험적 사유 안에 하나님을 가둬두는 기만행위이다. 신학을 통해서 나는 이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알게 된 사실은 하나님의 신비의 높이와 깊이였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구원, 교회 등을 개인적인 경험 안에서 무책임하게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대학원에 있을 때만큼이라도 사역, 취미생활, 다른 중요한 무엇보다 신학 공부만큼은 열심히 하자고 각오했다. 그러나 물론 3년의 대학원을 마무리하면서 내 신학적 소양이 상당히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학은 나의 신앙과 지식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가벼운 주제일 수 있지만 조금 더 원론적인 이야기를 담은 이유는 신학 없는 신앙은 자칫 사람을 교만의 올무에 걸릴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학은 내게 이를 알려주었고, 부족하지만 이것이 건강한 신학도의 자세라는 것과 겸손한 신앙을 만들어내는 네비게이션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