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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한 준비들

연구하고 배우는 것을 나누는 삶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목회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교회 개척을 하고 싶었으며, 언제든지 부르심이 있다면 선교하러 갈 생각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정한 꿈은 단 세 가지였다. ‘목회자, 선교사, 부흥사.’ 혼자서 개척하여 열심히 전도해서 많은 성도와 함께 예배하고 싶었다. 거대한 교회를 주축으로 삼아 여러 선교지에 가서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그러다 가끔은 부흥사로 초청받아서 다양한 교회에서 부흥 집회 설교하기를 꿈꿨다. 실제로 신학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그러한 삶을 준비했다. 전도 훈련을 받고, 어린이·청소년 사역자 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선교단체 동아리에서 자주 활동을 했다.

 

     전임 사역자로서의 진로를 준비하던 와중에, 어느 날이었다. 평소에 무척 존경하고 닮고 싶은 청소년 사역자이자 부흥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뉴스 헤드라인에 나오는 게 아닌가? 평소처럼 좋은 일로 나오겠지 하며 생각했는데, 아뿔싸! 그게 아니었다. 청소년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 뉴스 기사에 등장했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사를 잘못 쓴 건 아닐까 하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그 기사 내용은 사실이었다. 피해자도 한 명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증언하는 피해자만 여러 명이 나왔고, 일부는 아예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피해 인원은 더 많은 듯했다.

 

     당황스러운 점은 그 사역자의 범죄 행각이 밝혀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유명 사역자들의 성범죄도 차례대로 발각되었다. 개중에는 청소년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알았던 부흥사도 있었다. 그때부터 ‘목회’라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다. 교회 부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은혜를 끼치면 무엇 하나? 결국에는 파렴치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목회 같은 것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편이 더 좋았다. 그랬다면 적어도 ‘목회자’에 대한 인식은 사람들에게, 특히 피해자에게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이제 교회와 목회자, 개신교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특히, 나는 당시에 직접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었다. 어느 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교육전도사 일을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사역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오면서, 이걸 계속해도 되겠냐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뜩이나 마음도 복잡한데, 파트 전도사 사역을 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서 하나를 부흥시키는 일도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갖은 방법으로 전도를 해보려고 했다. 공원이나 학교에 나가서 직접 전도를 했고, 나중에는 ‘과외 전도’를 하기 위해서 광고지를 만들어 전봇대에 붙이고 다녔다. 말 그대로 무료 과외였다. 추운 겨울날, 전단지 수십 장과 테이프를 손에 쥐고 지하철역을 쏘다녔던 광경은 아직도 기억난다.

 

     흠모했던 사역자, 부흥사, 목회자에 대한 실망, 그리고 사역하는 것의 고단함은 나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내가 과연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잘하는 건 둘째치고 남한테 폐나 끼치지 않을 수 있겠나?’, ‘나의 적성과 특기에 진짜 맞는 일인가?’와 같은 질문이 마음속에서 거듭됐다. 고민에 고민을 더하다가, 일단은 군대에 가기로 했다. 군대에서는 나 자신을 진지하고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정말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렇게 일 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찾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공부하는 삶’을 살아보자고.

 

     물론, 모든 사람은 평생 공부해야 한다. 시험을 보거나, 뭔가를 암기하는 것만이 공부는 아니다. 새로운 일을 배우고, 직업 현장에서 기술을 익히는 이 모든 활동이 공부에 속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공부는 ‘공부 자체를 업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구하거나 교육하는 일을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워서, 그것을 나만의 형태로 만들어, 또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진로를 다시 정했다. ‘전임 사역자’에서 ‘전임 연구자’로 말이다. 목회를 아예 포기한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병행하는 일로 삼고자 결심했다.

 

     그렇게 다짐하니까 갑자기 과거에 어떤 일이 떠올랐다. 하루는 새벽기도회를 갔다 오면서 교회 차에서 고등부 담당 목사님과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목사님께서 내게 “준봉이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고 질문하셨다. 나는 그때 주저하지 않고, “저는 목회자, 목사가 되려고 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내가 볼 때, 준봉이는 왠지 신학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라고 말이다. 아마도 목사님은 수 년간 함께 교회에서 지내면서 나에 대하여 보고 느낀 점을 말해주셨을 것이다.

 

     영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설교자의 왕자’라고 일컫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은 자신이 쓴 책인 『목회자 후보생들에게』에서 목회자의 소명을 이야기한다. 목회자의 소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 바로 그것이다. 내적 소명이란 자신이 목회, 설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인이 정말 그러한 일들을 원한다면 내적 소명이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한편, 외적 소명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가’에 대한 영역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무리 목회자가 되고 싶어도, 많은 사람이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외적 소명을 받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비단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고 본다. 꼭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을 가질 것으로 믿는다. 회사에 취업을 하든지, 공무원이 되든지, 예술가가 되든지, 교육자가 되든지, 혹은 또 다른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연구자로서의 진로를 준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원하는 일이며, 다른 사람들이 도전해보라고 말을 건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길을 걸어가는 게 무척 고단하다고 할지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솔직히, 아주 자신은 없다만 어쩌겠는가?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잘라봐야지.

 

     앞으로 내가 어떤 진로를 걷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심 기대되기도 한다.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나의 꿈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하고자 한다. 솔직히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도 처음부터 계획해서 살지는 않았을 거다. 그것처럼 우리도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며 살아가자. 부르심에 따라,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도 따라서. 그 길 위에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할 것이라 확신한다. 나도 당신을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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