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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한 준비들

부르심과 부응

 신학을 하기전과 후에대한 글을 쓰려면 역시 나를 돌아봐야한다. 사실 신학을 하기전에는 내가 과연 기독교인으로 얼마나 소속감을 지니고 살았는지 부터 의문이 든다. 목회자의 아들로, 선교사시절부터 이어져온 기독교 가풍등이 나를 대변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누구나 그렇듯 삶의 궤적을 그리면서 그저 주어진 학업에 열심을 내기도하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이 다음 크면(?),어른이 된다면 남들 보다 조금 더 나은 물질적 환경을 꿈꾸었다. 대학의 갈림길 에서 조차 나는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름없는 어쩌면 성적맞춰 간다는 속설 처럼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몇몇 친구들은 나에게 아버지를 이어 대를 잇는 다는 멋진 표현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또 몇몇 친구들은 고등학교 시절 윤리와사상을 제일 싫어하던 애가 대학에 윤리 배우러 간다며, 자조섞인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신학을 전공하면서 바뀐것은 너무도 많다. 생각하는 법 부터 시작하여 삶의 전반적인 부분이 뒤엎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결과론적인 대답을 원할 것이다. 이전보다 나아진 나의 학업적인 토대, 사역에 대한 기술적인 진보등을 기대한다면 정말 미안하다. 물론 그런 세세한 것들을 이야기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변화는 내 자신보다는 주변사람들이 눈치채기 마련이다. 무엇으로 나의 신학함 전후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이렇다.

 

신학은 나의 삶의 궤적을 굉장히 흔들어 놓았다.

 학과 선택이 어떻게 삶의 궤적을 흔들수 있냐고 반문하기도 할것이다.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하지만 독자분들을 생각할 때 신학대의 들어오는 크게 두 흐름 '부르심'과 '부응'이라는 두가지 이유라 생각한다. 나는 부르심보단 오히려 부응에 가깝다. 대학을 가야하는 사회의 기대의 부응과 내 속에 의문으로 자리잡던 신에대한 물음의 부응이다. 부르심으로 온 많은 동료들도 삶의 궤적이 변한다. 이렇게까지 변하는 전공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삶의 궤적이 변한다는 것은 마치 공놀이를 처음 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 내가 보는 방향으로 던지지만 날아가다보면 바람의 저항과 여러 환경으로 인해 내가 생각한 방향성과는 다르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신학은 이런 삶의 궤적을 그리기 보단 그 안에서 여러 환경을 바라보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입학 할때 그랬다. 하나님 당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네요. 저는 그것이면 될 것같습니다. 라는 말을 의연중 다짐했다. 이때의 나는 적어도 내 삶의 궤적이 어느 정도 그려지고, 그 궤적대로 살아 갈 줄 알았다. 신학 학부과정을 마치고 보니 대답은 일찌감치 듣게 되었고, 궤적의 흔들림 속에서 나의 시선은 창조자가 만든 그곳을 향했다. 시선의 변화가 나의 삶의 변화로 다가왔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게되고 보게되었던 것들. 그런 모습들이 이제는 다가와 대화를 시도하며, 대상들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세상의 다채로움은 나에게 무채색이던 절대자에 대한 시선이,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제 나라는 '공'은 다시 던져진다. 야구에서 보듯 1루로 송구한 공은 이제 2루로 혹은 투수가 서있는 마운드, 그것도 아니면 홈 베이스에 있는 포수에게로 던져질 것이다. 날아온 지금과는 다른 궤적속에서 수만번 흔들리고 그 흔들림에서 나는 보지 못했던 나의 시선이 더 넓어질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