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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한 준비들

이전과 다른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신학을 전공하고 난 이전과 이후의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나는 한 50살쯤 되면 목회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유치원 때부터 내 꿈은 줄곧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뒤틀리고, 이것이 내 뜻대로 결정된 길은 아니었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지금 이 순간에 신학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으니,
꼭 지금의 나의 선택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이른 시기에 신학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것이 선물한 가장 큰 유익은 ,
이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동역자이자 친구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 같은 또래,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과 같은 일이다.

참 많은 유익들 중에서 이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목회자라는 소명이 단거리 경주와 같지않고, 마라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간, 수많은 것들과 마주하며 살아간다면
나는 내가 처음 품었던 그 모든 마음들을 정말로 변치않고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가족이 생기고, 아는 것이 많아지고, 지켜야할 것들이 많이 생긴다면,
때로는 정답보다 유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사람인 듯하다.

세상 속에 눈이 가리어졌을 때 내게 쓴 소리를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아픔과 절망 속에 허우적 거릴 때 서로 함께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또 때로는 나태함과 무지 속에 갇혀 있을 때, 내게 자극과 열정을 부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같은 고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함께여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또 목회자라는 소명이 겉보기엔 성경에만 능통하면 될 것 같고, 참 단순해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심지어 성서 하나만 하더라도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에는 큰 어려움들이 뒤따른다.

특히 성서를 온전히 공부하기위해서는 수많은 고전어와 언어들을 섭렵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왜 지금 나를 신학교로 보내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시기는 다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신학교를 택해야할지 머뭇거리고 있다면,
빠른 결정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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