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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그리고 기독교의 미래(feat.기독교세계관)



학제간 연구 그리고 기독교의 미래: 속도가 아닌 방향성을 바라본다.


한국을 둘로 나누라면 저는 문과와 이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스게소리로 말한 것이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성향을 이야기 할때 종종 드는 비유이기도합니다. 고등학교에서 두개의 계열로 나뉘게 되지만 실상 우리는 꽤 어린 시절부터 이런 나눔에 익숙해있던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요즘 대학에서는 이 두 계열이 협력을 넘어 만화처럼 합체하는 현상을 보게되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일컬어 학제간 연구라 칭합니다.

1970년대 까지 대부분의 영미권 대부분의 학문들은 학제 내 연구가 주를이뤘습니다. 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의 분위기를 중심으로 학문과 학문간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에선 근래에 들어 시작하게된 연구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 꽤 많은 학제간 연구의 결과로 새로운 학문의 태동(ict,아트테크놀로지)을 대학내에서 종종 찾아보게되었습니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는 결과물은 회사내에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회사들이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하기 위해 일명 TF(task force)팀이 그 대표적이 예시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인 공동체라 볼 수 있는 회사는 매우 다양한 외부적인 영향으로부터 극복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부서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공동체는 이제는 필수가 된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굉장히 복잡한 혹은 복합적인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어떨까요?


사실 기독교에서 타학문의 연구는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기독교세계관의 연구는 세상 학문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이 주를 이뤘고 이념의 이데올로기에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모양이 되었다.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 각 대학에서 신학과 타학문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서로의 필요성만을 확인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사실 학문적 연구라하면 기독교 내에서는 특정집단의 전유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학제간 연구의 결과가 회사속으로 들어갔듯이 이제 교회현장에도 우리는 학문적 교류가 결과로 나타날 시기입니다. 이 말은 교류가 없었다면 교회현장은 세상 속으로 향한다라는 구호는 허울 좋은 말로 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지금 현재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떠나서 교회 내에서의 다양한 소통의 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역할만 남아있는 지금의 교회는 과연 세상을 향해 다름을 이야기 할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나라 1세대 2세대 철학자들중 기독교인들이 꽤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학문적 혹은 신앙적 성장의 기초를 이야기할 때 교회학교시절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세상이 필요로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낼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교회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시절 목회자는 글을 읽을줄도 쓸줄도 알았기에, 마을의 많은 일들을 도울수 있었으며, 때로는 선생님으로 때론 의사로 때론 공무원(공무적인 일을 도와주는 일들)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시기를 지나갔습니다. 향후 10년이내면 대다수의 성도들은 최종학력이 이전세대보다 더 높아지고 대다수가 대학을 나온 분들일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에 비해 목회자의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축소된 목회자 역할이 아직도 과거의 지위에묻혀서 인지하지 못한 결과가 폐단으로 나타나 세상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현실이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고립되어가는 목회자가 세상으로 나아가고 성도들에게 조금더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조금은 긍정적인 것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학문적 변화가 이미진행되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미진한것이 많습니다. 몇가지 예시로 구약신학 신약신학이라는 범주를 고고학과 종교학등의 도움으로 분리시키며 구약학,신약학이라는 이름으로 타학문과의 교류를 이끌어내려하며, 기독교 신학의 총집합체라 불리는 조직신학이라는 이름 대신 기독교학이라는 이름을 통해 타학문의 방법론적 접근성을 용이하게하는 노력등이 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의 연구도 더이상 이념적 다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세상과 기독교의 소통의 역할로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음세대(교회학교를 지칭하는 것이아닌 앞으로의 교회)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을때, 신학적 전문성은 이제는 기초가 되었고, 목회자 각자의 다양한 전문성을 필요로 할것입니다. 교회가 학문적 공동체가 되자던가 이런 말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해야할 과제가 분명히 존재한다. 혹자는 생명의 뜻을 ‘명을 따르는 삶’이라는 기독교적 해석을 해놓기도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삶이란 것은 결국 이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시리즈를 몇개나 작성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글을 학부를 다니고 있는 후배들 신학을 하려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한국내 신학교들의 특성상 외부 학문을 쉽게 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도로 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만의 고유성을 지니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경제와 기독교, 법과 기독교, 공학과 기독교, 디자인과 기독교, 건축과 기독교등 자신의 달란트(talent/재능)를 통해 우리시대에 맞는 대화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테이블에 손을 맞닿아있다. 학문과의 연결의 가능성과 동시에 신학도 하나의 손으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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