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폴봉

죽음을 묵상하다

*오랜만에 쓰는 수필입니다. 약 한 달 전쯤에 작성한 비교적 최근의 글입니다. 항상 어디서 끌어오기만 했는데, 이건 그러한 부류의 글은 아닙니다..^^; '청년'이라는 주제로 제가 군대에서 겪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하였습니다. 담백하게 읽히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청년. 누구는 이 시기를 청춘이라고 부르며 예찬하기도 했다. 삶이 꽃피우고 앞날은 창창하며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기다. 생(生)을 향한 의지가 피어오르며 뜨거운 열정이 마음껏 솟아나는 때. 앞으로 살날이 많기에 죽음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때.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게는 오직 앞으로 향한 계획과 꿈만이 있었다. 적어도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2년 전 여름, 나는 군에 입대했다. 입대하기 전에 휴학원서를 내면서 교수님과 상담을 했다. 그때 나는 교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군대에서 무엇을 하고 오면 가장 좋을까요?”라고 말이다.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이러한 말씀을 해주셨다. “살아서만 돌아와라.” 그 당시엔 조금 의아했다. 당연히 살아서 올 텐데 뭐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으셨나 싶었다. 입대를 앞둔 나에게는 그저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목표가 필요했다.

 

 

 

 

      내 보직은 운전병이었다. 신병 훈련을 수료하고 군 차량 운전을 배우기 위해 가평에 있는 야전수송교육단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일과가 끝나고 혹은 휴일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 책을 읽었다. 책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책의 저자는 군에서 복무하다가 안전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부모님이셨다. 그 사고는 운전병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였다. 책을 쓰신 부모님은 수십 년이 지나고서도 아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추운 한겨울에 군용 트럭 위에서 떨어져 죽어간 아들, 그 젊은 청년은 운전 교육을 받는 내내 나의 기억 한 켠에 선명하게 남았다.

 

      운전 교육을 마치고 야전에서 한창 운행을 하던 무렵이었다. 나는 강원도 철원에서 복무하였기에 도로가 매우 험했다. 구불구불하고 가파르며 산길이 대부분이었다. 하루는 운행을 나가기 위해 기다리는 중에, 갑자기 선임이 새파란 얼굴을 보이며 다가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방금 사고를 목격하였다고 한다. 소형 군용차량 한 대와 2.5톤 트럭 한 대가 정면으로 부딪친 사고 현장을 내 선임은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날 밤, 뉴스에는 익숙한 도로와 장소가 송출되었다. 나의 선임도, 나도 자주 운행하던 길이었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트럭 운전자는 졸음운전을 하다가 역주행을 하였으며 그로 인해 정면에서 부딪친 소형 군용차량에 타고 있던 4명의 군인이 즉사했다. 운명했던 군인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비슷했다.

 

 

 

 

      그 일이 벌어진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죽음에 대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젊음과 늙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죽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렴풋이 기억한다. 어렸을 적에 나는 어머니께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나도 죽어?”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그럼. 모든 사람은 다 죽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마치 입대하기 전에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에 의아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에 대한 환상이 깨져 버렸다. 인간은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팔팔하고 건장한 청년이라고 자부하는 나 역시도 말이다.

 

      바야흐로 코로나19의 시대다. 수많은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느낌은 내가 또래 친구들보다 코로나19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계하도록 만들었다. 이따금 죽음을 묵상해본다. 나는 현재 ‘생(生)의 수평선’ 가운데 어디쯤 서 있는가? 더는 출발선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운명은 예고 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더없이 소중할 뿐이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살아가야 할 이유를 얻는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는 어머니와 교수님의 말씀에 수긍이 갔다.